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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un 13. 2022

"흰 금"을 둘러싼 욕망의 대서사시

큐레이터의 사(史)적인 시선: 국립중앙박물관 3층 세계문화관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김상옥(1920-2004) 백자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발췌)


국립중앙박물관 3층 도자실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 백자, 순백의 자태를 혹자는 '흰 금'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확장된 시선, 다양한 문화"를 키워드로 한 국립중앙박물관 3층 세계문화관 전시를 보고 왔다. 어느 한 나라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 문화의 다양성을 먼 발치에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어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한 공간들이었다.

올 해 7월 공개 예정인 메소포타미아 전시실을 포함해 세계문화관은 중앙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세계도자 총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6개의 주제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건 '도자기'였다. 도자기, 오늘날 흔하디 흔한 이 사물에 의해 몇 백년에 걸친 욕망의 대서사시가 쓰여졌다.



다도의 매력에 흠뻑 취한 욕망은 전쟁으로


일본관에 재현되어 있는 일본의 다실 다이안

일본에서 도자기에 대한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건 불교 선종의 확산 때문이었다. 경전을 딸딸 공부해야만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교종과 달리, 선종은 몸을 앞세워 수행만 한다면 삶의 모든 번뇌를 잊는다 설파했으니 인기를 누리게 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약하디 약한 인간의 몸이 아니던가. 수행을 하려 앉기만 하면 몰려오는 졸음은 누구나에게 곤혹이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공부를 위해 자세를 갖추어 앉으면 '검은 건 글씨요, 흰 건 종이로다' 어느새 아드로메다에 가 있는 정신을 경험하듯이. 우리의 졸음 DNA는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었다.

졸음의 처방으로 등장한 건 다름아닌 '차'였다. 사무실에 앉자마자 카페인을 복용하는 우리처럼. 옛날의 그들도 비슷한 해결책을 찾아 나섰던 거다.


복잡다단한 절차를 정성스럽게 거쳐야만 맛볼 수 있는 차. 전통 차를 맛본 이라면 차를 마시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 지를 체감해 보았을 테다. 게다가 잘 아는 것처럼 차를 준비하는 도구도 역시 다양하다. 차를 마시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멋 부리기 본성'이 고개를 들었다. 차를 담는 그릇, 다완에 대한 욕망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관에 전시된 일본 무사의 다양한 갑옷

16세기 중엽부터 일본에서는 '고려다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일상 생활용으로 제작된 막그릇을 들여와 찻잔으로 활용하던 일본인들은 이를 '고려다완'이라 불렀다. 중국산 다완에서는 볼 수 없는 대담한 조형미를 뽐내는 또 다른 매력이 일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결국 이 욕망은 전쟁에서도 분출되었다. 혹자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이 파탄에 이른 뒤 1597년 조선재침을 지시할 때 콕 집어서 '기술자'를 잡아오라 명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가 조선 도공, 이삼평이었다.

 


아무나 가질 수 없었던 '자기 하이테크'


1975년 전라도의 한 어부가 건져올린 신안 앞바다의 도자기들, 이 14세기 자기들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중이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옛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자기'라는 말도 사실은 '도기'와 '자기'의 합성어이다. 도기가 진흙으로 대충 빚어 만들던 그릇에서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단단한 그릇이었다면 자기는 차원이 다른 레벨이었다. 자기가 되기에 적합한 흙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보다도 그 흙을 빚어 유약을 바르고 높은 온도를 내서 갈라지거나 부서지지 않게 굽는 일은 그야말로 당시의 '하이테크'였다.

먼 옛날 자기 하이테크의 본산지는 중국이었다. 한편 그 하이테크를 일찍이 체득하고 독자적인 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던 나라는 자랑스럽게도 고려가 유일했다. '고려청자'의 명망이 높은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같은 3층에 위치한 도자실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의 도자기들

자기를 향한 열망, 하이테크를 꿈꾸던 일본의 욕망이 7년간 한반도를 핏빛으로 물들인 전쟁을 거쳐 어렵게 실현되었다. 이 전쟁이 향후 일본에 어떠한 일을 가져다 줄 지, 당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으로 얻은 하이테크, 일본을 새롭게 이미지 메이킹하다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중국의 청화백자,  오른쪽은 청화백자를 모방하여 제작된 유럽의 델프트 도기

16세기 무렵 바닷길을 따라 중국에 닿은 유럽인들은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혔다. 단단한 몸체에, 고르게 빛나는 투명한 살결, 그 위에 아름답게 수 놓아진 청색의 이국풍 그림까지. 생전 처음보는 이국적인 매력을 거침없이 뽐내는 중국 청화백자에 유럽은 열광했다. 심지어 독일은 중국의 도자기로 가득 채운 궁전(샤를로텐부르크성)을 짓기 위한 프로젝트까지 기획할 정도였다. 이처럼 귀족들은 앞다투어 중국의 청화백자를 들여오기 위해 아우성이었고 폭증하는 수요를 따라가기 위한 유럽 상인들의 집요한 노력 역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도자기 공급은 뚝 끊겼다. 중국 청화백자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유럽에서는 청화백자를 모방한 '델프트 도기' 까지 등장한 터였다. 조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7년 전쟁이 유럽에는 어떻게 보면 참을 수 없는 금욕의 시간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제작된 백자의 모습

7년 전쟁이 어렵게 끝났지만, 중국도 조선도 유럽의 열망을 채워주기에는 스스로가 더없이 바빴다. 전쟁의 상처를 추스르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찬란한 매력을 구가할 수 있는 자기를 폭발적인 수요에 맞추어 생산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실제로 고려청자의 전통을 이어 매력적인 자기 하이테크를 가감없이 발휘하던 조선도 전쟁 이후에는 조악한 그림이 그려진 겨우 형태만 갖춘 자기들을 생산해낼 뿐이었다. 조선에서 자기 생산이 다시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 건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 대 이후에 6명의 왕이 왕위에 오른 뒤인 영조 대의 일이었다.



일본의 국제무역항 나가사키를 묘사한 그림과 일본의 채색자기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어가는 중국대륙의 혼란 속에서 일본은 호황의 패를 거머쥐었다. 혼란의 틈을 수혜의 기회로 메우기 위한 일본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165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요구한 자기 56,700개를 일본이 납품하는데 성공하면서 유럽에는 메이드인 차이나가 아닌 메이드인 재팬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7년 전쟁 끝에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도공 이삼평을 기억한다면 그렇다. 이삼평은 1616년 이즈미야마산에서 자기를 구울 수 있는 흙을 발견하면서 일본 자기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조선 도공에게 얻은 하이테크로 일본은 전례없는 세계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채색 기술을 전수받고 더욱 화려해진 일본 자기

일본 가키에몬 가문에 전하는 문서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인에게 자기 채색 기술을 전수받아 오랜 시행착오 끝에 1647년부터 나가사키에서 채색자기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중국 청화백자를 모방하는 수준이었지만 시기를 거듭할 수록 유약 위에 붉은색, 녹색, 노란색, 청색 등의 안료로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 자체생산된 자기

한편 유럽 역시도 자기를 자체생산하기 위한 노력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핍은 성공의 원동력이 되는 법. 중국 청화백자로 가득 채운 궁전을 구상했던 독일이 가장 먼저 자기 하이테크를 성취할 수 있었다. 1709년 드레스덴 연구실에서 백자 생산에 성공한 독일은 1710년 마이센에 자기 제작소를 세웠다. 마침내 유럽도 자기 자급자족의 시대에 도래한 것이다.



세계도자실의 에필로그


오늘날 흔하디 흔한 도자기, 그 제작 출처가 중국이나 한국이기를 고대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 그렇지만 몇 백년 전 자기 하이테크를 유일하게 가진 나라가 이 두 나라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작은 분을 토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일 뿐. 그저 더 멋스럽고 깨끗한 일상을 염원했던 수많은 이들의 욕망이 이렇게 '도자기'를 키워드로 대 욕망의 서사시를 썼구나, 라는 선에서 초연히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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