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진한 존재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명쾌한 존재에게 띠우는
당신을 뭐라 지칭해야할 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있기는 한 걸까요?
망망대해에 홀로 돛단배를 띠운 것 같은 그런 막막한 날이 이어질 때,
수면위로 얼굴 윤곽만을 띠워둔 채 물의 입자 하나하나에 눌려 간간히 숨을 붙잡고 떠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당신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하염없이 이 세상이 슬퍼지고 너무도 무용해져, 앞으로 살아낼 나의 시간들이 아니, 요 바로 앞의 분초들마저도 소스라치게 무서워지곤 했어요.
인문학을 내 전공으로 택한 건, 고통과 불안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그나마 내가 손쉽게 쥘 수 있는 희미한 빛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고작 30년 정도의 시간을 살아온 내가 우습게도 몇 백 년 전의 일들을 마치 내 앞의 일들처럼 떠벌리고 곱씹어 볼 때면 인류의 운명을 논할 수 있는 현자가 된 것 마냥 들뜨곤 했었죠.
친구들도 나만은 늘 남다르다며 치켜세워주곤 하던 것에 은근 으스댈 정도로 나는 그 역할놀이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좋아서 달달 외웠던 몇 백 년의 시간들이 내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했어요.
세상을 향한 나의 남다른 시선들이 정말 ‘남달라서’ 절대 이해받지 못 할 거라는 생각에 한없이 작아지곤 해요. 그렇게 오랜 시간 애정을 갖고 들여다 본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설레게 한 많은 순간들이 세상 앞에 돈이라는 숫자로 치환되어갈 때 나는 내 위치를 찾지 못하고 아등바등 그 옆에서 조바심을 부릴 뿐이죠.
그렇게 세상의 답을 찾아나가려 했던 패기어린 마음은 내 나이에 비례하여 퇴색되어가고 말았어요.
사회적 지위가 어디쯤일까 가늠해 봐야하는 인습 앞에 나 역시 고개를 떨구고 내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죠.
그러곤 조금 더 잘 살고 싶다는 마음 앞에, 잘 사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황 속에서 끝없이 밑 빠진 욕망의 독에 가득 가득 무언가를 채우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기만 해요.
쉴 틈 없는 일상 속에서 가끔 빼꼼히 고개를 들어 심호흡을 해보곤 하지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끝없는 자기성장의 늪에 빠져 나는 무엇이 부족한 걸까 끝없이 스스로를 채근해요.
모두가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을 뿐인데, 그 조금이 모두 모여 사람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이 세상은 무엇일까요? 행복이란 건 무엇일까요?
행복이라는 감정을 생각하게 된 것도 인류의 시계 속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라는데, 그 이전의 사람들은 어떠한 불안과 괴로움을 이고 살아냈던 걸까요?
알 수 없어요.
이렇게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다가도 문득 하늘이 높고 파란 날, 햇빛이 쨍하고 내 속까지 훤히 덥혀주는 것만 같은 날, 나는 다시 희미해진 당신을 생각해요.
그래도 이 세상엔 무언가 붙잡고 살아갈 어떤 의미란 게, 답이란 게 분명히 있을 거라고.
형체 없는 당신은 나에게 조그맣게 속삭여줘요. 당신이 속삭이는 게 맞나요?
마음의 장막을 모두 걷어내고 삶의 끝에서 정말로 당신을 볼 수 있게 되는 날,
나는 당신을 무어라 이름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정말 실재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