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희 Jun 24. 2023

생애 두 번째 대프리카 여행기

팔공산과 김광석의 도시

‘대프리카’라는 수식을 가진 대구 지역에 대한 내 기억은 딱 하나였다. 바로 팔공산. 사학과에 갓 입학하여 한껏 들떠 있던 마음을 단번에 우울하게 만들었던 말도 안 되게 높았던 그 산. 팔공산에 올라 갓바위를 올려다보며 부처님이 정말 ‘부처님’로 보이는 진귀한 경험을 한 덕분에 내 뇌리 속에는 ‘대구=팔공산’이라는 불변의 등식이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11년 후, 팔공산이 다시 궁금해진 이유는 단순했다. 같이 일하게 된 동료 사원 중에 무려 두 명이나 대구 출신이었던 것. 대구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일상이 이어지자 문득 대구에는 한 번도 각 잡고 방문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대구=팔공산’이라는 등식을 깰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묵은 대구의 이미지를 쇄신해 보리라, 마음먹고는 대구로 향하는 KTX를 예매했다. 그렇게 내 생애 두 번째 대구 여행이 시작되었다. 



다시 팔공산으로 


  대프리카에 도착한 순간 눈에 들어온 건 정류장 지붕 언저리를 가득 메운 수증기였다. 온 섬이 한증막처럼 무더운 일본에서나 볼 법한 생경한 풍경에 내가 정말 대프리카에 왔구나, 실감했다. ‘대구는 습하지 않고 그저 뜨거울 뿐’이라는 대부심을 펼쳤던 동료에게 한소리 해야겠다고 결심하며 부리나케 택시를 잡아탔다. 

습관이 무섭다고, 용산에서 대구로 향하는 KTX를 탄 순간부터 내 검색기록에는 “대구 유적지”, “대구 역사” 등이 즐비하고 있었다. 가보고 싶었던 곳은 세계 문화유산이기도 한 대구 도동서원. 하지만 숙소에서 멀다는 이유로 동행인에게 단칼에 거절당하고야 말았다. 

  대안을 찾고 찾다 뜬금없이 팔공산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팔.공.산.’ 생각해 보면 꽤나 특이한 이름이었다. ‘공’자가 있으니 빨치산과 연관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찾아 들어간 지식백과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어릴 적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최수종 왕건’이 눈물 콧물을 흘렸던 바로 그 장면, 신숭겸 장군이 전사한 곳이 바로 팔공산이었던 것. 팔공산의 팔공은 그 전투에서 전사한 8명의 공신을 뜻했다. 스무 살 때 답사를 왔을 적 분명 답사팀 친구들이 팔공산에 대해 열변을 토했음이 틀림없겠건만, 이렇게나 생소할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했다. 그렇게 정해진 첫 행선지는 결국 팔공산, 다시 팔공산이었다. 



대구에 있는 짝퉁 석굴암?


  무릇 사람은 문명을 이용해야 한다. 역시 사람은 자연에 도전하면 아니, 절대 아니 된다. 차를 타고 올라간 팔공산은 평화, 그 자체였다. 신숭겸 동상을 지나 팔공산에 자리한 카페 중 가장 힙한 곳도 찾아가 힐링도 했다. 그렇지, 이것이 인생이지 하며 너도 좋고 나도 좋은 분위기를 깨버린 건 역시나 불뚝 튀어나온 나의 답사 본능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의 몹쓸 습관, 똥색 표지판만 나오면 고개가 돌아간다. 그날도 그랬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제2석굴암”이라 적힌 표지판이었다. 엥? 석굴암? 석굴암 너가 왜 여기서 나와…. 흥분해 버린 나의 텐션 앞에 동행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장 가자. 저 짝퉁 석굴암으로. 그 정체를 확인해 버리고 말겠다는 결심이 서기가 무섭게 어느덧 제2석굴암 주차장에 발을 내디뎠다.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일명 제2석굴암 <출처: 문화재청>

  마치 스스로가 인디아나 존스라도 된 것처럼 자연과 유산이 함께한 곳이라면 유난스럽게 빨라지는 나를 좇아 동행자는 허덕였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꽤나 미안하긴 하다) 짝퉁 석굴암은 결코 짝퉁이 아니었다. 제2석굴암의 진짜 이름은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이었다. 1962년에 지정된 엄연한 국보이기도 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연 암벽을 뚫고 그 안에 불상을 둔 형태가 경주의 석굴암과 비슷하여 “제2석굴암”이라 이름 붙인 것 같았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고 들면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이 경주의 석굴암보다 무려 100여 년도 앞서 세워졌다는데, 군위 지역이 석굴암 브랜딩에 실패한 대가인가,라는 실없는 생각도 하며 즐거이 답사를 마쳤다. 



어느 수집가의 초대 


  다음날이 밝았다. 어제는 내 알고리즘에 맞춰 짠 여행 루트로 움직인 까닭에 약간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점심 메뉴를 동행자가 정할 수 있도록 후하게 인심을 베풀기도 했다. 서울보다 2/3밖에 안 되는 가격에 인심 후한 곱창 쌀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대구에 대한 호감은 급속히 올라갔다. 

등촌 유원지 근방 미친 비주얼의 곱창 쌀국수와 나시고랭

    호쾌한 기분으로 차에 타 동행인이 정한 행선지로 가려던 찰나, 결국 내 눈에 다시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2번째 똥색 간판, ‘국립대구박물관’ 문체부 산하의 박물관이 대구에도 있었나,라는 시답지 않은 소리로 동행인의 주의를 끌어보았으나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가고 싶었다. 요즘 국립박물관 브랜딩이 한창이잖아. 대구는 어떻게 꾸며 놓았을까, 두 번째 운을 떼는 순간 동행인은 싸하게 내 의도를 알아채고 말았다. 그래, 가보자. 곱창 쌀국수의 힘 덕분이었을까, 동행인은 순순히 박물관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두근두근 두 번째 답사가 시작되었다. 


역시나 팔공산으로 브랜딩을 시도하고 있는 국립대구박물관
이건희 기증전 내부 모습

    아니 이럴 수가. 국립대구박물관에서는 이건희 기증전이 한창이었다. 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할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바로 그 전시. 대구 버전의 이건희 기증전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상상도 못했는데, 뜻밖의 호재였다. 서울에서와는 달리 웨이팅 없이 바로 입장이 가능했던 것도 또 다른 매력이었다. 전시된 유물들은 서울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회화 작품들은 더욱 풍성했다. 전시실 중간중간을 장식하고 있는 대구 출신이었던 회장의 어록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문화의 힘을 믿었던 그의 오랜 행보가 이렇게나 어마어마한 컬렉션을 탄생시켰구나,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아름다운 사람, 김광석


  가장 좋아하는 것을 뽑으라면 셜록 홈즈, 작가 한강, 사카모토 류이치, 김광석. 참 많다. 그중 김광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왜? 김광석의 도시 대구에 다녀왔으니까. (그런데 사실 김광석은 대구 출신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생을 서울에서 보냈다고 한다. 대구시가 김광석 브랜딩에는 성공했다는 후기일 수도)

  김광석을 알게 된 건 어느 날 '혼자 남은 밤'을 듣고서부터였다. 그 밤의 나는 혼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유독 세상에 혼자 남아있다는 생각이 사무치게 들어서일까. 이미 세상을 등진 김광석의 목소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왔다. 구슬프면서도 조금은 명랑했던 그 목소리. 

  그 뒤로 틈이 날 때마다 김광석의 노래를 찾아들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변해가네',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등 사랑 노래도 좋았지만 '나의 노래', '일어나'라는 노래는 김광석의 삶에 대한 철학이 들어있는 듯해서 더욱 좋아라 했다. 

1995년 6월 29일에 열린 김광석 슈퍼 콘서트, 작고 아담한 방에서 종종 즐겨 틀어놓곤 한다

  그중 '일어나'는 내가 사랑하는 한강 작가가 즐겨 듣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로 그 후광이 한층 더 찬란해졌다.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하기 얼마 전에 썼다는 그 노래의 가사가 내 마음을 강하게 후벼 팠다.



일어나 가사 中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중략)

가볍게 산다는 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

세상이 외면해도 나는 어차피 살아 살아있는걸

(중략)



  어떻게든 생을 살아내려 했던 절절함이 묻어났기 때문이었을까. 유독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종종 이 노래를 들었다. 끝내 김광석 그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그 역설적인 노래를. 


김광석 거리의 초입에서

  이미 세상에 없는 그를 기념하는 거리라지만, 거리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유쾌했다. 골목골목 즐비한 이벤트성 상점들. 조그마한 확성기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의 사랑 노래. 김광석 혹은 그의 노래를 새로운 여과지로 재창조한 수많은 콘텐츠들. 사람들은 분주히 거리를 돌아다니며 소소하게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그 분위기에 취해 김광석 일러스트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또 '김광석 사주' 자판기에서 사주를 뽑아 들고 즐거이 읽어내리기도 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이런 걸까. 서른셋. 지금의 내 나이보다 1년가량을 더 살아낸 그가. 영원히 서른셋에 멈추어 있는 그가. 그는 영원히 모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수없이도 맺혀 있구나, 싶었다. 실제 그의 삶은 어떠했을지 아무도 모른다. 진부한 일상을 쳇바퀴를 간신히 버텨내고 하루하루 흘러 보내는 그 분초가 너무도 힘이 들어서. 일상의 모든 것들을 기민하게 하나하나 사유하는 스스로의 감수성에 지쳐버려서. 그렇게 세상을 등졌을지라도. 서른셋의 그는 이렇게 영원히 살아있구나.

  어떤 삶이 더 좋은 것일까. 더 아름다운 것일까. 무상한 잡념이 지나갔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김광석 그는 이 세상을 이 삶을 슬프지만 아름답게 사유하려던 사람이었다는 것. 



다음의 대프리카를 기약하며

  이번만큼은 푹 쉬고 오리라, 마음먹었던 여행이었지만 지칠 줄 모르는 답사 본능 덕에 다시금 나만의 ‘알쓸신잡’스러운 여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나다운 것을. 다음번에 대구로 향할 때는 도동서원을 꼭 들러보겠노라, 결심했다. 그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행인이 이후 다시 동행해 줄지는 미지수이지만. 

작가의 이전글 댕댕예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