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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Sep 11. 2023

건축이 일상에 주는 철학

뮤지엄 산 안도 타다오 전시를 보고

교과서를 개발하는 일을 한지 어느덧 반년이 훌쩍 지났다. 1차 가쇄본을 찍고 나니 새삼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한다. 만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온 직장에서 이곳에 오기까지는 겨우 일주일. 그 짧은 텀에 학예사에서 편집자로 휙 명함이 바뀌어 버렸다. 처음하는 일이라 서툰 것도 있었지만, 이직 후 몇 달 간은 새로운 정체성을 실감조차 못하고 벙찐 상태로 지낸 탓에 어버버 일정에 쫓겨 끌려 온 것 같다.

1차 가쇄본을 만났을 때야 비로소 스스로 편집자의 길에 들어섰음을 체감했다. 서툴게 찍은 첫 종지부를 찬찬히 훑어보며 감회가 새로웠다. 숱한 날을 고민으로 지새웠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길 참 잘했다 싶었다. 여직 갈 길은 멀었지만, 지금까지의 여정을 톺아보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싶었다.



먼 옛날 성곽이 모티프가 되었다는 뮤지엄 산의 어느 한 공간


그렇게 길을 떠났다. 오랜 습관이 무섭다고, 이번에도 발 길이 닿은 곳은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뮤지엄' 산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등고선과 어우러진 건물이 참 멋드러진 곳이었다. 뮤지엄 산에서는 그곳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한 '안도 타다오' 특별전이 한창이었다.


"청춘이란 한 시절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렸나니 청춘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프롤로그 공간에는 청춘을 상징하는 푸른 사과가 놓여 있었다. 청춘이라는 단어를 보고 마음 한 켠이 뭉클해지는 나이는 아직 아니라지만, 명쾌한 문장에 마음이 산산해졌다. 자유자재로 뻗어가는 정신을 몸이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하더라도 나는 일평생 청춘일 수 있을까, 문득 애잔한 생각이 들었다. 그 정신을, 마음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어렵고 어려운 숙제가 아닐까.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 한계에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다가올 미래를 긍정하는 건, 덧없는 생에 의미를 가하는 유일한 길일 테다.

전시실을 가득 메운 실험적인 그의 건축물들이 인상 깊었다. 머릿속에만 있던 막연한 구상을 땅에 단단한 물성으로 앉혀 놓을 때마다 그가 느꼈을 두려움을 상상해 보았다.

어떠한 결과물을 내는 과정에서 자신을 대담하게 내던질 만큼의 열정을 쏟는다는 건 다르게 보면 용기의 일인 것 같았다. 결과가 정성과 시간에 비례하지 않으면 그것만큼 속이 상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실패로 얼룩진 밤마다 움츠러든 마음을 끊임없이 펴내며 그는 무엇을 바라보았을까. 어떻게 매순간 스스로의 가능성을 긍정하며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견뎠던 걸까.                                        


"안도 타다오는 자신의 건축을 개별이 아닌 다양한 상황이 입체적으로 개입된 맥락으로 생각한다. 그의 건축은 역사에 정착된 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과거에 현대의 장소성을 심는 맥락의 힘을 보여준다."

궁지로 내몰렸을 때 웅크러든 마음을 추스르고 의연히 다시 길을 나서는 태도가 늘 중요한 것 같다. 세상의 풍파에 힘없이 떠밀려 가지 않으려면, 떠밀려 가더라도 다시금 길을 찾을 수 있으려면, 길을 비추는 나만의 등대를 세워 놓아야 한다. 그래야 등대의 빛이 뻗어 나가는 곳으로, 다시 컴컴한 어둠을 물리치고 내달릴 수 있을 테니까. 

안도 타다오의 등대는 '맥락'인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대담하고, 어떻게 보면 무모한 실험적인 건축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은 풍경의 맥락을 해치지 않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치밀한 계산 아래 요리조리 터놓은 창들이 바깥의 갖은 풍경을 비추고 있다. 그의 건물은 안이지만 동시에 밖이다. 안팎이 마치 하나의 몸처럼 조화를 이룬다. 그러면서도 건물의 시선에서 바라본 풍경은 다채로운 새 옷을 입는다. 그렇게 건물의 존재만으로 장소는 새로운 이야기를 갖는다. 

문득 안도 타다오의 건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환경에도 매끄럽게 녹아들 수 있으면서도 제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낼 수 있는 사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러한 경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늘 체감하게 된다. 조직이 짜놓은 체제에 자신을 유연하게 조율해 가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잃지 않는다는 건 늘 어려운 일이니까. 그럼에도 일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는다면, 조금은 그 언저리까지 흉내라도 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새벽에 바라본 북한강의 전경

숙소로 돌아와 지친 마음을 한아름 내려 놓고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조금은 산뜻한 마음이 되어 아침에 눈이 일찍 떠진 김에 주변 자연을 둘러보러 나갔다. 드높은 산맥을 주위로 북한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에 마음이 멎는 것만 같았다. 

자연스럽게 강물이 더 잘 보이는 곳으로 몸이 이끌렸다. 무엇에 홀린듯이 북한강의 차디 찬 물에 발을 담그고 어푸 어푸 세수도 했다. 긴 세월 한없이 같은 자리에서 여러 풍경을 휘감아 돌았을 강물을 생각하니, 새삼 살갗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아 오르기도 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늘 그 자리에 의연하게 머물고 있는 저 자연처럼 나도 조금은 더 힘을 내보아야겠다.' 

늘 이렇게 자연에게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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