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는 마감은 언제 오나
지금은 목요일 저녁 7시.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지나간 어제를 돌아본다. 2차 가쇄가 끝났다. ’가쇄‘가 ‘가라 인쇄’라는 뜻이라는 것도 몰랐던 시절이 손에 잡힐듯 가까운데, 1차도 아니고 벌써 2차란다. 가쇄 전 최종 교정을 앞두고 어제는 회의실에 옹기 종기 모여 동료, 선배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너도 나도 넋을 빼고 앉아 김밥을 하나, 하나 입에 욱여 넣고 있는 광경이 참 웃프기도 했다. 우리 왜, 집에 못 가니. 가쇄 직전 마지막 교정을 보고 하판할 때까지는 집에 가지 않는 게 관행이란다. 하판이란 편집자가 교정을 보는 책상에서 교정지(판)를 내려 놓고(하) 교정을 마친다는 의미이다. 집에 못간단 말에 입을 삐죽 내밀고 김밥을 사왔건만 이렇게 함께 앉아있는 것도 꽤나 추억이잖아, 하며 피식 웃음도 났다.
2차 가쇄 직전까지의 교정은 7~8번이었다. 무엇이든지 해보아야 안다고 편집자의 업이라는 게 이처럼 지루하고 지루한 여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매번을 마지막 교정처럼 꼼꼼히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깨끗한 교정지를 받아들어 하나 하나 뜯어 보다 보면 어느새 모든 면들이 벌겋게 물든다.
이렇게 바꾸었다가, 또 저렇게 바꾸었다가. 이게 띄어 쓰던가, 아니면 붙여 쓰던가, 표준국어대사전 사이트를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을 들락 날락한다. 문장 한 줄, 아니 조사 하나, 어미 하나를 바꾸어도 의미가 달라지는 터라 운신의 폭은 좁디 좁다.
그러다 내용 수정 피드백이 들어오면 사료는 물론 내로라 하는 역사 개론서, 자타사 교과서 모두를 한 데 모아 놓고 뒤적이며 가장 균형 잡히고도 의도한 모든 뜻을 품을 수 있는 적절한 문장을 고르고 고르며 머리를 싸맨다. 베끼는 것은 절대 금물, 문학적인 표현도 절대 금지, 정제되어 있되 한자 표현은 되도록이면 지양하면서. 이렇게 한땀 한땀 다듬은 문장은 교과서 문투에 맞게 다시 적절히 손을 봐야 한다. 휴, 이제야 좀 괜찮겠지 싶으면 이게 뭐야, 문장 줄 수가 정해놓은 규격 선을 저 멀리 넘어 버린다. 편집자는 그를 ’넘쳤다‘고 명명한다. 지금부터 세글자, 세글자를 줄여야 넘치지 않는다. 다시 펜을 집어 든다.
어디 이 뿐이랴, 모든 편집자에게 공유되는 편집 매뉴얼은 추가되고 추가되다 한글 파일로 5페이지 가량을 훌쩍 넘어 버렸다. 사료 배경은 어떤 디자인 틀을 썼더라, 여기는 글씨체랑 pt가 어떻게 정해져 있었던가, 여기는 몇 번 띄어 쓰기로 합의를 봤었지. 유별나게 깐깐한 사람처럼 모든 면에는 자를 들이밀어 이리 재고 또 재어 본다. 본문과 자료의 간격은 13에서 20mm, 자료와 사진 간 간격은 4mm, 활동 자료 숫자와 문제 사이 간격은 6mm, 단원 명과 필수 학습 요소 간 간격은 22mm. 이렇게 보다 보면 외울 법도 한데, 애석하게도 인간은 ‘인공지능’이 아닌 ‘지능’을 가진 동물이라 그저 매뉴얼을 마르고 닳도록 볼 도리밖에.
그렇게 시간을 잊은채 자리에 틀어박혀 편집 삼매경에 빠져들면 어느새 목과 어깨, 팔과 다리가 쿡쿡 쑤시다 못해 저려오곤 한다. 아, 일자목이여 영원하라.
넋을 놓은 채 하염없이 천정을 바라보고 누워 있노라니 그동안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차 가쇄가 끝났다. 앞으로 남은 교정은 3번. 10교를 꽉꽉 채워 넣으면 이제 드디어 출원이다. 아무리 조선을 사랑하여 선택한 일이라지만, 똑같은 내용을 10번 넘게 돌리고 돌리다 보니 우리 제발 헤어지자. 정말 헤어지고 싶은 마음 뿐이다. 들끓었던 애정을 군데 군데 기워 보겠다고 쉬는 날엔 사극 정주행을 하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앞으로 1개월, 최종 오케이는 12월 11일. 그 때까지 다시 촘촘한 시간들을 흘려 보낼 생각을 하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오늘은 잊자. 우선 2차 가쇄는 오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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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마다 연재 중인 MBTI 시리즈, 한 주에 하나씩 쓰기가 정말 어렵네요..
자료 조사를 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글의 흐름을 기획한 뒤 작정하고 쓰는 시간도 너무도 오래 걸려서 가능한 한 1주에 하나씩 연재하는 게 목표이지만 2주에 하나씩 쓸 수도 있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ㅠ_ㅠ
12월 첫 주에 교과서 마감이니 그 이후에는 잘 지켜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