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서평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 업무량과 사사건건 트집 잡는 상사. 야근을 마치고 친구와 만나 술 한잔하는데 이놈이 말을 알아듣지를 못한다. ‘그게 왜 힘들어?’ ‘너 일 알려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난 네가 왜 힘든지 모르겠어. 설명 좀 해주면 안 될까?’ 선택지는 두 개다. 차근차근 왜 힘든지 설명해주는 것과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가는 것. 후자를 택하고 싶겠지만, 꾹 참고 전자를 선택해본다. 지금부터 들을 얘기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의 이야기이니까.
책 ‘아몬드’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병, 알렉시티미아에 걸린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청소년 성장 소설이다. 창비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이며 교보문고 스테디셀러 중 하나다. 일본 서점 대상에서 2020년 최고의 번역 작품으로 선정돼 국외에서도 저력을 보였다. 출판평론가 한기호는 ‘아몬드’를 ‘한국형 영어덜트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했다.
윤재는 머릿속에 있는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가 고장 난 채로 태어났다. 그의 엄마는 병이 나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에게 아몬드를 먹였다. 아몬드를 한입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어보지만, 그의 아몬드는 변하지 않았다. 윤재는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희로애락오욕’을 배웠다. ‘미안해’, ‘고마워’라고 말하는 상황부터 미소 짓는 법까지. 소년은 둘의 도움으로 근근이 학교에 다녔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할머니와 엄마가 잔혹한 사건에 휘말린다. 할머니는 하늘로 떠나고, 엄마는 식물인간 신세로 병원에 남게 된다.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사이코패스’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윤재는 자신의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잔인한 성정은 갖고 있지 않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작가는 피가 흩뿌려진 잔혹한 장면을 보여줘 독자를 휘어잡은 후 감정이 없는 아이의 목소리를 빌려 담담하게 이야기를 진행한다. 독특한 설정에 매료되어 스토리를 따라가면 주인공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에 대신 분노하고, 알 듯 말 듯한 감정을 더듬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에 미소 짓게 되기도 한다.
주인공은 엄마와 할머니가 떠났음에도 슬퍼하지 못했다. 그 후 어머니의 친구, 심 박사의 도움으로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된다. 고등학교에서 ‘곤이’와 ‘도라’를 만나면서 무채색이었던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한다.
곤이는 붉은색이다. 보육원 출신의 불량 청소년으로 주인공에게 폭력을 일삼는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주인공에게 좌절하지만, 행동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는 주인공에게 고통, 죄책감, 아픔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도라는 하늘색이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도라는 누구도 주인공에게 하지 않았던 질문을 던진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도라는 머뭇거리는 주인공에게 자신도 꿈이 증발했다며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둘은 점차 친해지고, 주인공은 도라를 떠올릴 때마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선윤재: 제가 그 앨 좋아하는 걸까요?
심 박사: 글쎄 그건 네 마음만이 알겠지.
선윤재: 마음이 아니라 머리겠죠. 뭐든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뿐이니까요.
심 박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마음이라고 얘기한단다.
이 책은 독특한 설정 위에서 사랑을 말한다. 주인공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데 사랑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윤재는 알게 모르게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마주한다.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 친구와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사랑.
윤재는 아몬드를 몇 번이고 씹어 넘겨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통해 알게 된다. 이 책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이런 사람이라도 사랑할 수 있어?’ 작가는 이렇게 답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다.’
저자 손원평은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첫 장편소설 ‘아몬드’ 이후 장편소설 ‘서른의 반격’으로 제주4.3 평화문학상을 받았다. 올여름 영화 ‘침입자’의 감독과 각본을 맡아 영화인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