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 만들 줄은 몰랐다.

종이에서 책으로

by 소근

처음 디자인을 선택할 때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하면 영상, 광고, 3D 같은 프로그램과 디지털 매체 위주로 배웠는데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다. 디자인은 화면 안에서만 존재하고 내 손에 잡히지 않으니까.


교수님 이것이 바로 디자인인가요?
대체 어디까지가 완성이죠??
제가 뭘 만들려는 걸까요???

작업에 대한 의구심과 화면 속 결과물의 비실제성에 매력을 그다지 느끼지 못해서 1학년 동안은 꾸역꾸역 학교 수업만 따라가고 있었다.

지루해하던 어느 날 1학년 전공실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옆을 보았는데 전공실 바로 옆 제품 디자인과 학생들이 다들 위아래 슈트로 된 알 수 없는 때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고 가구로 만들 나무도 자르고 세라믹 덩어리도 만들다 말았는지 이 재료 저 재료들이 다- 어질러져 있는 것이다.


‘이거야!’.



멋모르는 시디과 신입생의 눈은 부러움이 가득했다. ‘나도 저 과에서 다양한 소재들 알아가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구나 설치물 뚝딱뚝딱 만들고 싶다.’ 하는 마음이 슬슬 커지면서 한동안 혼자 ‘정말 전과해야 하나?’, ‘저 과 애들 세 보이던데 적응할 수 있을까’ 김칫국 많이 마셨다. 정말 전과를 했어도 되지만 이왕 시작한 시각 디자인을 좀 더 알아보자 생각하고 마음을 접고 있는데 머릿속에 미술을 시작하기 전 내 모습이 생각났다. 미술이 어떤 건지도 몰랐지만 종이나 천으로 편지봉투랑 필통, 지갑 같은 걸 만들어 그림도 입히고 선물할 때 내가 만들었다고 어필도 한번 해주고, 별거 아닌 만들기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키보드만 두들기는 거보단 재질을 만졌을 때 그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이 디자인을 하고 싶은 욕구와 맞닿아 있는 걸 느끼면서 디지털 작업이 오프라인과 연결되는 것들을 떠올리게 됐고 그때 편집디자인 동아리를 만났다. 제품 디자인과 학생이 나의 풋풋했던 초심을 찾아주었나.

학교 수업엔 선택지가 없었던 내가 편집 동아리에선 정말 열심히 작업했다(학점 관리는 좀 할 것을, 나중엔 쌓인 학자금 대출 잔액 보고 약간 후회했다). 동아리에선 책을 구상하고 완성되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이 빠짐없이 재미있었다. 도서전을 준비하며 책의 주제를 잡고, 형태를 고민하고 무엇보다 어떤 종이를 사용할지 에스닷에 가서(서울에 두산 종이가 있다면 대구엔 에스닷이 있었다) 고르는 시간들. 책이 나왔을 땐 책등의 두께와 적당한 그 무게를 느끼는 것이 좋았고 표지와 책날개, 양장 제본 등 책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이 책이라는 하나의 결과로 내 손에 쥐어졌다. ‘전공은 이걸로 해야겠어’.





책을 디자인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저처럼 시각디자인의 광범위한 분야 중에서 헤매고 있거나 헤매 본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해서 적어본 글입니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신입생 때만 해도 그런 다양한 상황을 고려할 시선도 아직 갖추지 못했기에 더 고민도 많았던 게 아닐까 합니다. 전공을 선택할 때 이유 불문하고 이게 좋아!라고 하면 좋은데 생각도 겁도 많은 1학년 학생일 뿐이었으니까요. 지금 직업이 있는 게 참 다행이고 어떤 이유든 분야를 선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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