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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Aug 15. 2016

가방을 만들다. 열아홉

마침내


마치 모죽이 뿌리를 내리듯이 아주 느리긴 했지만, 펀딩을 향해 한 걸음씩 꾸준히 내딛은 발걸음 덕분에 내 옆을 스쳐가는 광경은 황량했던 출발선에 비하면 매우 이채로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일요일 저녁에 사진을 받아들 본인의 일정을 살펴보더니, 하루만에 상세 페이지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적잖게 분노한 고향 친구와, 볼때마다 나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제품 소개 영상이 꿈에서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직장 상사 아니다. 친구와 한 대화이다.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앞두고 목요일에 라오스로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던 나의 친구. 그 떠나감을 너무나 아쉬워했던 회사는 그녀로 하여금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고 싶었는지, 마지막까지도 일더미를 한아름 안겨줌으로써 다가온 이별을 아름답게 장식하려 하였고, 그 덕분에 친구는 여행 준비로 즐거워야 할 주말을 자신의 업무용 모니터 앞 고스란히 반납하고 말았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고작 이틀의 시간만을 남겨두고 상세 페이지의 완성을 부탁했던 것이다.

비록 말투는 투박하고 성정은 드세나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여린 그녀는, 올해 나에게 하고자 마음 먹은 지거리의 8할 가량을 하룻밤 사이에 다 퍼부은 듯 하였으 마치 본인의 일처럼 너무나 열성적으로 꼼꼼하게, 그리고 예쁘게 상세 페이지를 완성해주었다.


괜히 디자이너가 아닌 것이다.


제대로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에 도리어 면목이 없어질 정도로 너무나 열심히 도와준 친구 덕분에 오랜 시간동안 나를 고민하게 만든, 그 투박하기 그지없던 소개글은 사진의 촬영을 완료한지 하루만에 '아이폰'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나의 프로젝트를 담당하시 매니저님의 조언을 참고하여 조금의 수정을 거친 후 마침내 상세 페이지의 업로드를 완료하였다. 수요일까지는 이틀의 시간이 남은 월요일 오후. 때마침 찾아온 몸살 기운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만 있고 싶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의 고민 끝에, 회생이 힘들어 보이는 비루한 영상에 마지막 숨결을 불어넣는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온갖 노력들이 다 허사였다.


가끔은 포기를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동영상은 애초에 안될놈이라는 것을 조금 더 빨리 깨달았다면 여유를 가지고 조금 더 좋은 영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하루를 꼬박 영상에 파묻혀서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야 이것은 새로 찍을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하루의 시간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화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촬영을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 어떻게 찍어야 하나 고민을 할 것도 없었다. 혼자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얹어두고는 제품이 화면에 꽉차게 적당히 확대한 다음, 초점만 맞추면 끝이었다. 약간의 시행착오 끝에 크로스백을 분리하는 장면, 칸막이를 사용하는 장면, 시크릿 포켓에서 여권을 꺼내는 장면까지 촬영을 완료하였다. 물품 보관함에 가방을 넣는 장면은 도저히 혼자서 찍을 수가 없었기에 저녁을 먹자는 빌미로 근처에 사는 친구를 꾀어내어 김포공항 옆 어느 대형마트의 물품 보관함에서 촬영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사실 공항에 갈 필요도 없었다.


영상이 전혀 복잡하지 않으니 편집을 하는데 긴 시간이 걸릴 이유도 없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영상을 오려붙이고, 자막도 넣고 배경음악도 넣는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비로소 남들에게 보여주어도 될 만한 영상이 만들어진 듯 하였다. 마침내 그 길었던 여정의 마침표를 찍을 순간이 찾아왔다. 뿌듯함과 안도감이 묘하게 공존하는 마음을 부여잡고는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업로드를 하고 프로젝트 제작 페이지의 영상 링크를 수정했다. 펀딩을 시작하기로 한, 바로 그날의 새벽 네시였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어떤 감흥을 느낄 새도 없이 잠에 빠져다. 아침이 밝아오면, 드디어 시작이다.






안녕하세요. 박인혁입니다. 왜 내가 원하는 여행 가방이 세상에 없을까 고민 하다가 다니던 회사를 작년 초 그만두고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양천가방협동조합의 장인들께서 만들어주시는 제 가방, 첫번째 가방으로 두 번의 펀딩을 통해서 많은 분들과 만났습니다. 약 1,500 분의 소중한 고객님들께서 저의 시작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가방을 만들다'는 그 첫발을 내딛기까지 제가 겪은 일들을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드는 가방이 없어서 회사 때려치고 만든 여행 가방. 출시 반 년 만에 1,500명의 선택을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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