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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Jan 27. 2018

여행을 가다. 나가노, 두번째

나가노, '17.12.06(수) ~ '17.12.09(토)



전날의 여독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고생의 크기에 비하면 개운한 하루의 시작이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친구놈의 일본인 친구, '미노리'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친구놈은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댄다.



오늘의 목적지는 유다나카. 삼면이 산지와 면한, 나카노(나가노가 아니다)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의 자그마한 동네이다.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하늘의 표정이 밝지는 않았고, 종종 눈발도 흩날렸다.



한 시간이 조금 안되는 시간이 지났다. 더이상 갈 곳이 없는 기차는 바퀴를 구르는 것을 그만두었고, 약간의 적막이 감도는 플랫폼에는 서늘한 바람이 끊임없이 스치었다.



회사 다닐 적 가뭄에 콩 나듯 일본에 출장을 오고는 했다. 남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출장으로 일본에 오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는 않았는데, 방문할 공장들이 대체로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곳에 있었을 뿐더러 찾아가는 길이 여간 힘든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기차를 두어번 갈아탄 다음에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역을 나서면 언제나 '이런 곳에 공장이 있다고?'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들고는 했다.


유다나카 역에 내린 기분이 딱 그랬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일본은 어딜 가나 온천이 많다. 아직도 활발히 활동을 하는 화산이 많은 탓인데, 이 동네도 다르지 않다. 얼마 전 분화 소식이 들려온 군마현의 쿠사츠시라네산 역시 나가노시에서 불과 30km가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그런 덕분에 일본의 기차역에는 족욕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시설들이 많이 있다. 유다나카역 앞에도 자그마한 족욕탕이 있었는데, 방금 만난 미노리를 앞에 두고 발을 담그고 있을 수는 없어서 사진을 남기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대신했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지고쿠다니 원숭이 공원. 역시나 화산지대이며 원숭이들이 노천탕에 몸을 담그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길바닥에 널부러진 야생 원숭이라니. 쉽게 상상이 되지도 않거니와 그리 믿기는 일도 아니었기에 한 두마리나 보면 운수가 좋은것이겠거니,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미처 털어내지 못하고 나뭇가지와 잎사귀 위에 소복히 쌓인 눈은 원숭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볼거리를 더한다.



오늘 처음 만난 두 친구이지만 이런 저런 얘기들을 참 많이도 나누고 있다. 그 수다스러움에 한마디 얹고 싶지만 할 줄 아는 일본어가 마땅찮은 나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헌데 미노리의 한국말이 생각보다 훨씬 유창하다.



30분 쯤 걸었으려나, 원숭이 공원임을 알리는 표지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름도 정직한 눈 원숭이 공원이다. 눈과 공원은 있으니 원숭이만 있으면 완벽하다.



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방 천지 원숭이판이다. 완벽하게 정직한 이름의 눈 원숭이 공원. 찾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진 안에만 세마리의 원숭이가 뛰어다니고 있다.



이 사진 안에는 모르긴 해도 열마리 가까운 원숭이가 숨어있다. 야생을 뛰어다니는 원숭이를 처음 봤는데, 원숭이는 산을 엄청나게 잘 탄다.



아마 살면서 지금까지 본 원숭이보다 이 공원에서 본 원숭이가 배는 많을 것이다. 이 녀석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아예 신경 자체를 쓰지 않는 것 같다. 사람 키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나름은 조심스럽게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었는데, 그게 민망해질 정도의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한다.



사람과의 공생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닌것인지, 이 녀석들은 누가 쳐다보건 말건 각자의 일을 하기 바쁘다.



무리에서 힘 좀 쓰게 생긴 커다란 덩치를 가진 녀석이지만, 물을 마실때 만큼은 다소곳하다.



원숭이와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유다나카역으로 돌아왔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었기에 역 앞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기로 한다.



방수포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모양새가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는데 기대 이상이다. 아마도 동네 사람사랑방이 되어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었으리라. 편한 차림 사람들이 저마다의 수다를 떨고 있는 스무평 남짓 되어보이는 이 공간은 아늑하고 따뜻하다.



물론 음식도 맛이 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차려진 한상에 생맥주를 더하니 나가노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다.



딱히 정해진 행선지가 없었기 때문에 관광 안내도를 보면서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꽤 진지한 토론 끝에 정해진 곳은 밤으로 유명한 오부. 도에 표시가 되어있는 동네는 아니었다. 관광 안내도는 그냥 궁금해서 구경 한 번 했다.



유다나카에는 원숭이 공원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하나가 더 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훨씬 더 익숙하고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바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배경의 모티브가 된 온천장. 얼마나 대단한 곳일까 내심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냥 상상 속에서만 남겨둘걸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한다.


이상하다 싶은 구석이 있어서 구글링을 조금 해보았으나 여기저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자처하는 곳이 많은 듯 하여 자세한 사실관계 확인은 포기하였다. 이 동네 사람인 미노리가 맞다고 하니 앞으로도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으다.



참 다행스럽게도 미노리가 차가 있었던 덕분에 이곳 저곳 움직이는 것이 수고스럽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조수석에서 말상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지 않아도 되는 나에게만 다행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여튼 그런 덕분에 오부세까지 오는 길도 편안함 그 자체였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미노리상.



이 동네는 밤이 유명하다. 그 외에 유명한 것은 밤과, 밤. 그리고 밤이 있다. 원숭이 공원에서 평생 볼 원숭이를 다 보고 왔다면 이곳에서는 지금까지 살면서 본 것보다 더 많은 종류의 밤이 들어간 음식들을 구경했다. 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딱히 찾을 이유가 없는 것 같다..만 해마다 백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유명한 곳이라고 하니 방금 한 말은 취소를 하도록 하자.



백만명이 다녀가는 유명 관광지로서용은 다행히 겨울에는 미치지 않는 듯 하다. 그런 덕에 우리는 한적한 오부세를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은 압도적인 규모와 뛰어난 세련미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저마다의 색깔이 있었고, 유행에 기대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오며 남긴 자취들은 그 와중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대부분의 상점들이 밤을 주제로 한 무언가를 취급하고 있었고, 나는 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찾아먹을 일은 없는 밤이다.



결국은 밤이다. 워낙에 밤이 유명하다고 하니 괜히 궁금해진 이유도 있을 것이며, 사방 천지 밤밖에 없어서 그 선택지를 포기하고 나면 마땅히 먹을만한게 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아이스크림이 겨울에 먹어야 맛인 것은 말해봐야 입만 아픈 것이고, 그것을 간과할지라도 '괜히 밤이 특산물인 것이 아니구나', '과연 허명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만드는 훌륭한 아이스크림이었다. 혹시나 나가노에 갈 일이 생긴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오부세에 들러보도록 하자. 이곳의 밤은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오부세에서 오붓하게 밤과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이 지평선 어드메에 걸쳐있다. 다음 발걸음이 닿을 곳은 미노리의 친구 에리카가 살고있는 동네인 나카노이다.



여행을 가서 현지인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일본에 와서 노래방을 가게될 것이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세일러문 자매들의 본거지같이 생겼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이곳은 노래방이다.



미노리의 말에 따르면 일본 내에서 꽤나 유명한 노래방 프랜차이즈라고 했다. 조금은 어두침침한 조명이 먼저 떠오르는 한국의 노래방과는 다르게 밝은 분위기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방마다 주제를 달리하여 내부를 장식한 것 역시 재미있는 점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린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있는 이 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 시간 조금 더 있었을까, 미노리의 친구가 퇴근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와 친구, 두 명의 일본인 친구들을 태운 한대의 차가 나가노를 향해 부지런히 바퀴를 구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마신 산토리 하이볼은 한결같이 단맛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이래나 저래나 맛있는 술이니 만드는 법이 어떻다고 한들 맛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입맛이 아직 유아기에 머물러있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더 단맛이 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노리와 함께 온 친구는 같은 대학에서 만난 사이라고 한다.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나에게는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닌데, 친구 덕분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안주거리 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많은 이야기와 맛있는 음식이 함께한 즐거웠던 이튿날의 저녁이 이별을 고하였다. 내일의 여정을 기약하면서.




어디에서든 어김없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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