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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Feb 05. 2018

여행을 가다. 나가노, 세번째

나가노, '17.12.06(수) ~ '17.12.09(토)



새로운 하루를 여는 태양은 간밤의 즐거웠던 시간을 뒤로한 채 오늘도 어김없이 떠올랐다. 나가노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아침이자 여행의 세 번째 날이 밝았다.



'한밭'과 비슷한 '장야'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답게 평화롭기가 대전에 견줄 만하다. 그런 나가노에서의 시간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역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예약했지만 꽤나 만족스러웠던 호텔과도 이별해야 할 시간이다. 고마웠습니다 치선 그랜드 나가노. 떠나는 순간의 시원섭섭함은 회백색 하늘을 벗 삼아 남기는 사진 한 장으로 달래 본다.



마침내 간다. 잔뜩 성난 하늘 아래 나와 친구를 실은 열차가 향하는 곳은 바로 가미스와. 첫날 가려고 했으나 시간이 허락하지 못해 가지 못했던, '너의 이름은'에서 미츠하가 살던 그 동네.



심상치 않다. 얼마나 고생을 시키려고 이렇게나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있는 것일까.



가미스와까지 한번에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별로 멀지도 않은 곳인데 환승을 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나와 친구를 괴롭힌다. 마쓰모토에서 멈춰선 애꿎은 기차만을 탓하다가 끼니나 해결할 요량으로 잠시 동네를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잔뜩 움츠러든 뱃속이 도무지 유람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에 띄는 가장 가까운 식당에 들러 아침부터 해결했다. 특별한 것은 전혀 없지만 그렇기에 안전한 마츠야, 그 중에서도 돼지고기 덮밥은 실패하는 게 더 힘든 선택이다.



가미스와로 가는 기차 시간표를 보고 있으니 굳이 개찰구까지 지나쳐 밖으로 나온 수고로움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본전을 뽑아야 한다. 나는 딱히 흥미가 없지만 그런 곳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친구를 위해서 마쓰모토성을 둘러보기로 한다.



한국에 비해 따뜻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추위를 맞이하는 자세가 조금 더 유별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심 덕에 이 녀석은 올 겨울을 춥지 않게 나고 있다.



나가노현에서 손에 꼽게 큰 도시이자 공업 거점이라고 하는데 그런 느낌은 없다. 되려 자연과 가까운 동네의 면면과 도시 전체에 나직히 자리한 차분함은 여러모로 춘천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별 생각없이 나선 길이었기에 동네에 대한 감상은 딱히 없었다. 그렇지만 도회적인 것과 거리가 먼 풍경을 만날 때마다 '돈 굳었다'는 생각을 하는 이상한 습성을 가진 나로서는 시골 풍경이 가져다 주는 다정다감함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우리나라도 비슷하지만 'n대 국보', 'n대 미항'과 같이 줄 세우고 손가락으로 꼽는 것을 참 좋아하는 일본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5중 6층 구조의 천수각을 가진 마쓰모토성 역시 '일본을 대표하는 4대 국보 성'에 꼽히는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5중 6층 구조의 천수각이란 겉보기에는 5층이지만 실제로는 6층으로 된 천수각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내부를 둘러봤음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겠다.


솔직히 탐탁치 않았다. 하지만 친구가 원하니 천수각을 올랐다. '후회할 텐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마음을 깨끗하게 비웠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었지만 왠지 친구는 후회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르는 내내 친구의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천수각을 오르는 계단이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오르기 힘들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마쓰모토성 천수각은 정도가 많이 심하다. 계단이라기보다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본인의 무릎이 얼마나 튼튼한지 알아보고 싶다면 강력히 추천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먼발치에 공장 굴뚝이 보이지만 시가지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다. 바로 앞 시선이 머무르는 곳의 풍경은 그저 조용한 시골 동네였고, 나는 그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천수각 등반을 끝으로 마쓰모토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넓게 펼쳐진 스와호의 장관을 고대하고 있던 나와 친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미스와를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우리를 실어나른 열차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카메라에 담겨 있었다.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행 도중에 짐 만드는 것을 정말로 혐오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등짝 하나로 모자라 두 손 가득한 짐가방 때문에 이미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익숙함을 넘어 지루함이 밀려올 법한 비슷한 풍경의 연속이었지만 마침내 스와호를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임이 가득했다.



열 번 스무 번은 더 보았을 풍경이 여지없이 눈앞에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탁 트인 시야를 원한다면 당연히 높은 곳에 올라야한다.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와 다르게 부지런한 친구놈은 영화에 속 풍경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을 찾았다며 갑자기 산을 타기 시작한다.



지도상으로는 목적지가 한참 남았지만 조금씩 눈 앞이 열리기 시작한다. 분명히 고생하는 보람이 있겠거니, 벌써부터 기대가 한가득이다.



조금씩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오른 나와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삼십 분 넘게 올라갔는데 아직 반이 넘게 남았고, 눈발이 점점 거세져서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는 더욱 커져만 간다. 영화 속 모습이 조금씩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핸드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아무것도 아니야'가 귓전을 조용히 흐른다. 사내놈 둘이었지만 충분히 낭만적이다.



사나운 눈발이 주변 시야를 완벽하게 가리기 시작했지만 괜찮다. 올라가다 보면 괜찮아질 것이다.



좋은 등산이었다. 너의 이름은 속 호숫가와 마을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일찍이 일본에서는 겪어본 적이 없는 추위와 살을 에는 바람밖에 남은 것이 없었지만 좋은 등산이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차갑게 식어가는 몸뚱아리를 가눌 길은 딱히 없었지만 괜찮다. 좋은 등산을 했으니깐.


성지순례 같은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굳이 이곳을 와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차 한대 끌고 오자. 굳이 두 다리 괴롭혀 가며 사서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 와중에 발견한 두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스와호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큰 호수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 다르게 이 동네는 그다지 시골이 아니라는 것. 이 정도면 충분히 가치있는 개고생이 아니었나 어금니 꽉 깨물고, 눈물을 머금고 생각해 본다.



거진 두 시간 동안 땀을 바가지로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이 너무나 급했다. 그렇지만 가미스와역은 플랫폼 밖에 화장실이 없다.



거의 도망가다시피 열차에 몸을 욱여 넣었다. 마쓰모토성에서 천수각을 오르는 동안 이미 반쯤 닳은 무릎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와 친구는 아픈 신음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기절하다시피 잠에 빠져들었다. 가끔 눈을 떠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친구가 과연 살아있는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숨소리가 끊이지는 않았다.



등산 두 번 했을 뿐인데 도쿄에는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다시금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두 눈 질끈 감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다스렸다.



캡슐호텔은 처음 이용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남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훨씬 안락함이 있었다.



숙소를 찾기까지, 그리고 이 돈까스집을 찾기까지 많은 여정이 있었지만 도저히 기록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릇 한 번 잘못 건드렸다가 살의에 가득찬 주인 어르신의 눈빛을 마주해야 했지만 다행히 무서운 어르신은 아니셨고, 돈까스 역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다.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뭘 먹든 맛이 없을 수가 있었겠냐만 말이다.



눈이 비처럼 추적추적 흐르는 도쿄의 밤이었다. 하루종일 가방과 짐더미에 짓눌린 몸이 여전히 비명을 질러댔지만 뱃속에 든든하게 밀어넣은 돈까스 덕분에 모험을 향한 욕구가 다시 한 번 조금씩 솟아오른다.



그리하여 찾은 스카이트리. 내려다보는 도쿄의 밤이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 날씨 덕분에 미련없이 포기하였다. 아마 사내놈 말고 여자친구와 함께 오라는 하늘의 계시였으리라, 친구의 몫 역시 그대로 남겨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 더 둘러보려 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국에 살아서는 돌아가야하지 않겠냐는 친구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던 바, 서둘러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맥주 한 캔과 편의점 음식 하나를 놓고 오가는 조금의 대화,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든 어김없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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