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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Feb 06. 2018

여행을 가다. 나가노, 마지막

나가노, '17.12.06(수) ~ '17.12.09(토)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출근길과 함께 맞이하는 주중의 나흘은 참 긴 시간인 것 같은데, 이방인에게는 너무나 짧디 짧은 시간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그 아쉬움과 개운함이 교차하는 순간을 이번 여행에서는 도쿄에서 맞이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오후 두시에 나리타 공항을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댔다. 여행을 왔음에도 이렇게 부지런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했다만, 일곱시 반에 일어난 나와 친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갈 채비를 하기에 바빴다.



아주 가깝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쿄역과 긴자에서 걸어서 25분이면 찾아올 수 있는 오크 호스텔 캐빈. 대단히 훌륭하지는 않아도 위치나 가격 모두 충분히 합리적인 수준이었기에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한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아키하바라. 애니메이션이나 전자제품을 아주 좋아하거나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쯤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드디어 가보게 되었다.



지금 쓰고 있는 카메라가 일본에서 만든 것이니 일본에서 사면 조금 더 싸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요도바시 카메라를 꼭 들러보고 싶었으나, 정말 안타깝게도 그 꿈을 이번에는 이루지 못하였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언젠가 또 기회가 있겠지 싶기는 하다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역시 범상치 않은 곳이다. 귀여운 것을 합쳐놓으면 어마어마하게 귀여울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이렇게나 귀여운 포스터가 붙은 옆 가판대에는 성인 잡지가 잔뜩 놓여있었다.



꽤 공기가 차가운 주말의 아침이었다. 열시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유독 한 점포 앞에만 입장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궁금해서 몇명이나 될지 세어보려고 하니 '여기부터 대기인원은 100명입니다.' 안내하는 표지판을 들고 있는 직원들이 중간 중간 눈에 띄었다. 이 줄의 끝이 어디일까 너무나 궁금해서 따라가보는데 정말 끝이 없다. 가게 안에 비트코인이라도 널부러져 있는건지, 대체 뭐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흥분에 찬 모습으로 줄을 서있는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새로 출시되는 게임기를 사기 위해서 기다리는 줄이려나, 유명한 게임의 신작이 새로 발매되는 것인가 나름의 추리를 해보았지만 놀랍게도 이곳의 정체는 빠칭코 센터. 조금 난해한 광경이었지만 아침잠을 이기고 먼길을 달려온 사람들의 열정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아키하바라를 찾은 것은 기념품을 사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 어디에서도 점포의 셔터가 올라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고, 나와 친구는 스키야에서 식사부터 해결하기로 하였다.


장어도 맛있는 음식이고 돼지고기도 맛있는 음식이면 장어 돼지고기 덮밥은 더 맛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별로 깨닫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었지만 그 배움의 순간을 회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길은 애석하게도 없었다.



이미 지나간 아침밥에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두 시 전에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하는 나와 친구에게 그런 것으로 볼멘소리를 할 여유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다행히 다음 행선지를 정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시 아키하바라는 애니메이션 아니겠는가. 이 곳을 가지 않으면 과연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의견 교환도 필요치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게의 문을 열어젖혔다.



과연 그 선택은 옳았다. 완벽하게 옳았다.


만화를 전혀 즐기지 않음에도 돌아간 눈이 제자리를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원피스의 연재 분량이 이렇게 어마어마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을 뿐더러, 앞으로 연재가 한참 남았다는 사실 역시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렇게나 좋은 것들도 많이 취급하고 있다. 역시나 선진국은 선진국이다. '선'이라는 글자가 자꾸 다르게 읽힌다면 여러분을 자책하자.



비행기 시간이 두어 시간 정도 연착이 되었으면 하는 꽤나 그럴듯한 바람을 간절하게 품어보았지만 아쉽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그래도 무거운 양 손이 더욱 무거워진 채로 나리타 공항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도쿄역에서 나리타 익스프레스에 몸을 싣고나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나들이가 작별의 손을 들어보이고 있었다.



만, 역시 끝날 때 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한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 나리타 익스프레스라고 했는데 예정된 시간보다 20분이 넘게 늦어버렸다. 나름 시간 여유가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카운터의 셔터가 닫힐랑말랑 하는 불편한 순간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정신없이 수속을 하고 출국장에서 보안 검색까지 마치고 나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너무나 정신이 없었던 통에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 자체가 없었는데, 양 손 가득히 들려있는 짐의 무게가 이제 다시금 느껴지기 시작한다.



타지와의 작별에는 역시 술이 필요하다. 겨우 돌아온 정신을 부여잡고는 의자에 널부러져 한 모금 들이키고 나니 이제서야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실감이 난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나리타. 집으로 가즈아!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른지 얼마 되지않아 커다란 산봉우리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후지산이었으면 하고 부지런히 뷰파인더에 담아냈는데 그 정체를 아직도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하였다. 도쿄에서 대구로 가는 비행기의 항적과 시간을 감안하여 지도를 찾아보았을 때 후지산임은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누군가가 확인 한 번 해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다.



다시 돌아온 대구. 나와 친구 모두 너무나 지쳐버린 것인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향 사투리 속에 한참을 파묻히고 나서야 한국에 돌아온 것이 실감이 났다. 바야흐로 2017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나가노 여행이 그 마지막을 알리는 순간이다.




어디에서든 어김없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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