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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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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박인혁 Mar 27. 2018

여행을 가다. 대만 타이중, 두번째

타이중, '18.03.07(수) ~ '18.03.11(일)

아침이 밝았지만 어두운 기운이 남아있다. 다행히도 내린다고 했던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둘째날이 시작되었다.

모기의 먹잇감이 되어 간밤 잠을 설친 여자친구, 그 모기가 다행히 나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덕분에 편안한 밤을 보냈다. 침대에 눌러붙어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고픈 배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식당으로 이끈다.

꼭대기 층에 위치한 이 공간은 쾌적하고, 정갈했다.

정말 끔찍하리만치 맛이 없었던 모든 음식들을 제외한다면 꽤 만족스러운 공간이었다. 밥 먹을 때 말고는 언제 이곳에 올까 싶기는 했지만.

올 것 같지 않았던 비는 결국 쏟아지고 말았다. 추적히 젖은 바닥을 밟으며 타이중 역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오늘의 목적지는 타이중에서 20분 밖에 떨어지지 않은 한적한 시골 동네 '창화'. 그 시절의 우리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렇게도 해맑은 미소를 가진 소녀 '션자이'와 그녀를 흠모하던 사내 놈들의 어린 시절을 담고있는 동네이다.

영화 속 션자이를 제외하고는 다른 곳에 눈길을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커징텅의 홀딱 벗은 모습만이 그나마 마음 속 한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남아있지만, 그런게 대수겠는가. 원래 성지순례는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만을 담아 경건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아직도 완전히 마무리가 되지 않은 신축 역사가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지만 기차가 지나다니는 길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마치 동대구역에 조치원에 어울릴법한 선로를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 조금 어설픈 듯 하지만, 그것이 나름의 매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호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출입문이 열릴 때 마다 오갈데를 잃고 잔뜩 고인 화장실 냄새가 한꺼번에 객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는데, 어느 자리에 앉아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열차가 출발한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나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특이점'이라는 개념도 연속한 함수의 기울기가 급격하게 커지는 지점을 말하는 것일텐데, 마치 가우스 함수처럼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꽤 이채로웠다.

가깝다. 정말 가깝다. 아마 신림동 고시촌에 살고있는 내가 우리 집에서 버스를 탔으면 아직 서울대입구역에 도착하지도 못했을 시간임에도 나와 여자친구는 창화 땅을 밟고 있었다. 대만은 춥지않은 동네라고 알고 있었건만, 들고오지 않은 패딩이 아쉽게 느껴질만큼 바람은 쓰렸고, 공기는 차가웠다.

내리는 비에 싸늘히 식은 공기가 잔뜩 몸을 움츠리게 한다. 대단한 것을 바라고 온 것은 아니지만 기대 이상으로 대단하지 않은 동네이다. 구파도 감독이나 가진동, 천옌시의 이름을 내건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 아닌 기대를 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아무리 평일이라지만 '성지순례'를 핑계삼아 이 동네에 온 여행객을 떠나서 애초에 거리에 사람이 없다.

대만에도 이렇게나 잘생긴 사람이 있구나 감탄하면서 한참을 보고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오른쪽 아래에 '공유'라는 두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있다. 한국에서 잘생긴 얼굴이 어딜 가겠는가. 참으로 잘생겼다.

시외버스가 오고 가는 간이 정류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10년 전 즈음, 대전에서 학교를 다닐 때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서 정류장에 가면 딱 이 정도의 오래된 느낌이 있었다. 꽤 옛날이 되어버려 기억 저편에서 조용히 숨어만 있었던 풍경인데, 이렇게 다시 끄집어내게 되니 정겹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을 휘감아 조용히 흐르는 실개천은 대만을 정의하는 단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조금씩 내리는 빗방울이 수면에 닿아 잔잔한 파문을 만들며 부서지는 모습은 대단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처음 찾은 이곳 창화의 지문처럼 남아서 머릿속에 더 오래 잔상을 남길 것 같다. 물론 맑은 날 왔으면 더 좋았을 것은 말해 무엇하겠냐만.

구파도 감독의 유년 시절을 품어낸 곳이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실제 촬영지로도 쓰인 정성 고등학교는 지도를 보고 찾아갔음에도 그 모습을 쉬이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나는 길을 결코 못찾는 편이 아닌지라 이것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표지판 하나 없이 이렇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골목길을 지나쳐야 만날 수 있는 그곳은 아마 누가 되었어도 한번에 찾지는 못했을 것이다.

구글 지도를 살펴보며 그 이유를 방금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찾아간 곳은 정문이 아니었다. 대로변에 있어서 눈에도 잘 띄고 찾아가기도 훨씬 쉬운 정문이 있는데, 여자친구와 나는 굳이 찾기도 쉽지않은 골목을 둘러서 뒷문 앞을 찾아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한 것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한다. 어찌됐든 도착은 했으니 별 상관은 없지만.

이곳이 후문이라 그랬던 것인지, 평일이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애초에 들어갈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긴 했지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은 것과 들어갈 수 없어서 그러지 못한 것에는 차이가 있다.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보려고 학교 주변을 기웃거려 보았다. 영화 속 그들이 오후 시간만 되면 쓸고 닦던 운동장 옆 구령대와, 그 옆에 나란히 늘어선 길고 곧게 뻗은 나무들도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학교 주변으로 울타리를 따라 한바퀴 둘러볼까 하였지만 빗방울이 거세지는 통에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찾아보기 힘든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기차역으로 다시 돌아왔더니 미터기는 꺼져있었고, 영 좋지 않은 가격을 들이민다. 노래 한 곡 온전히 듣기 힘든 시간만에 택시에서 내렸는데 4천원이 넘는 돈을 요구하다니, 역시나 관광지에서 씌우는 바가지는 만국 공통인가보다.

하지만 아주 큰 돈은 아니기도 했고, 아프다고 느껴지는 경계에 가까워진 고픈 배가 한계 신호를 자꾸 보내오는 통에 별 말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가 오는 마당에 우산을 쓰고 불괘산에 올라 강시 구경을 하고 싶지는 않았고, 학교 담장 한 번 구경했으니 창화에서 볼 일은 다 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해야하는 일은 아장육원에 들러 '육원'이라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육원집이 자리한 이 거리는 실제로 구파도 감독이 어린 시절 살던 동네라고 한다. 그래서 영화도 이 근처를 배경으로 촬영이 많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미리 알았다면 배고픔에 지친 절박함보다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저 거리를 걸을 수 있었을텐데, 아쉽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자필이었을까? 커징텅과 그의 무리들이 얇고 단단한 종이 쪼가리로 박제가 되어 가게 앞을 지키고 있다. 아마 자필이었겠지 싶기는 한데,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사인이 있었다는 것도 사진 정리를 하면서야 발견하였다.

아마 떡볶이 정도 될 듯 하다. 대만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친숙하고 자주 먹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한가지 재밌는 것은 별 생각 없이 찾은 이 곳 창화가 대만에서 육원을 처음 만들어낸 동네라는 것이다. 오늘은 여러모로 운수가 좋은 날이다. 이 모든 것을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된 것만 뺀다면.

오른쪽 아래의 기름기가 맨들한 호빵같은 것이 육원이다. 겉은 아주 쫄깃하고 속에는 돼지고기와 죽순이 적당히 들어있다. 하나에 40원이니 한국돈으로 1500원 정도 하는데, 먹을때는 저렴하다 생각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싸다고 얘기하기는 힘들겠다.

왜 이렇게 밋밋하고 사실에 기반한 서술을 하느냐 하면, 별 맛 없었다. 심지어 아사 직전의 위급한 상황에서 입으로 가져간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적어도 나와 여자친구의 입맛에는 그랬다. 황갈색의 저 소스가 문제였던 것인지, 육원이라는 음식이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사카린을 잔뜩 찍어바른 찹쌀떡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죽순의 쓴맛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이 이유인 것 같은데 적당히 잘라서 한 입 물고는 씹다 보면 소스의 단맛이 가시기가 무섭게 코가 쭈뼛거리는 쓴맛이 사정없이 치고 들어온다. 그것은 아마 이곳의 육원만이 안고있는 문제였으리라 생각은 하지만 나는 앞으로 이 음식을 먹기 위해 내 주머니에서 먼저 돈을 꺼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학교도 돌아봤고 육원도 한 접시 했다. 팔괘산은 영화 속 모습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 굳이 가지 않기로 한다. 여전히 흐르는 빗줄기를 헤치고 타이중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창화행 열차에 몸을 실은 순간부터 여기까지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 촉박한 일정에 성지순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괜찮은 환경이다. 참고토록 하자.

날이 조금 더 추워졌고, 몸에 잔뜩 진 짐이 거추장스럽기 시작했다. 간단히 짐 정리를 할까 싶어 숙소로 돌아왔다. 애초에 끼니를 해결할 요량으로 먹은 육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근처 빵집에 들러 점심거리를 조금 사왔다. 사진 속 빵 위에 올려진 가루는 돼지고기를 말려서 간 것이라고 하는데 소위 말하는 '단짠' 그 자체, '단짠'의 성서이자 교과서와도 같은 맛이다. 대학 교양수업으로 '단짠학개론'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 빵으로 말미암아 개설되는 과목일 것이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하게 맛있다는 뜻이다. 대만에 다시 갈 일이 생긴다면 저 빵 만큼은 반드시 먹어야겠다 생각했을만큼 맛있었다.

빵집이 참 특이했다. 딤섬과 간장에 졸여낸 닭다리, 계란 같은 것을 같이 팔고 있길래 호기심에 몇 가지 골라봤다. 딤섬은 딤섬집에서, 간장 닭다리는 닭집에서 먹도록 하자.

적당한 음식으로 배를 적당히 채웠으니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타이중에는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꽤나 명성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원래도 박물관을 좋아하는 나와 여자친구가 내리는 비 때문에 바깥을 돌아다니기가 어설펐던 것은 아마도 하늘에서 이곳을 찾으라는 신탁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당 대만 돈 100원. 한국 돈으로 4천원이 조금 안되는 가격 덕분에 일단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는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과연 중국의 적통을 계승했다 자부하는 대만답게 중국어 이외의 언어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한국어는 애시당초 바라지도 않았지만 영어라도 있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인데, 비가 와서 어설픈 바깥이지만 글자를 놓고도 읽지를 못하는 나의 모습도 영 어설프기 짝이 없다.

해시계처럼 생기기는 하였다만 역시나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괜찮다. 이 박물관의 모든 것은 공룡을 위해 존재하는 들러리일 뿐이기 때문에. 사실 뭘 봤는지 기억도 안나고,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뭘 보기는 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렇지만 이 공룡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곳을 한 번 더 찾을 용의가 있다.

뭐가 중요한가. 공룡이 있는데. 이렇게 티라노사우루스가 있는데. 심지어 이 녀석은 움직이는데 말이다.

현생 조류의 조상님도 이렇게 계신다. 자연사박물관은 공룡이 있음으로 제 몫을 다 하는 것인데, 이곳은 이미 그 몫을 차고 넘치게 하고도 남았다.

이렇게 북녘에 계신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그분의 테라코타가 조금은 뜬금없지만 괜찮다.

이곳에는 티라노사우루스가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움직이는 티라노사우루스.

정말이지 나는 타이중 자연사박물관의 티라노사우루스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녀석은 아마 밤이 되면 살아나는 신묘한 능력을 가졌을 것이다. 이미 지금 내 마음 속에서도 마음껏 살아 움직이고 있지만 말이다.

브랜드의 힘은 위대하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발견한 너무나 익숙한 간판. 심지어 한 블럭이 넘게 떨어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여자친구는 이곳에 닭갈비가 있겠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오늘의 저녁으로는 여자친구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훠궈를 먹기로 했다.

훠궈라고 하면 마라가 들어간 매운 국물에 이것 저것을 익혀서 먹는 음식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라간 들어간 음식이 입에만 들어갔다 하면 온 속이 뒤집어진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이곳에 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올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맵지 않은 국물에 먹는 '백탕'이라고 부르는 훠궈가 있다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칭징훠워궈', 타이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훠궈 식당이면서 꽤 고급스러운 곳 중 하나이다. 손님 한 명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라면 남는 공간 하나도 아까울 법 한데, 가장 눈에 잘 띄는 1층의 한가운데를 분수와 연못에 양보한 결정이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감탄이 한 번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이곳의 장점은 말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가격이 너무나 착하다. 테이블 위에 무언가가 끝없이 나오는데 심지어 양이 많아서 다 먹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모든 것이 합쳐서 3만 5천원밖에 하지 않았으니, 내가 대만에 살고 있었다면 정말이지 매일 오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