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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Apr 12. 2018

여행을 가다. 대만 타이중, 세번째

타이중, '18.03.07(수) ~ '18.03.11(일)



대만 땅을 밟고서도 넘쳐나는 일거리에 마음을 온통 팔아버린 탓인지 밤늦게까지 노트북을 잡고는 산처럼 쌓인 고민거리 위에서 잠드는 날들의 연속이다. 애초에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거세게 밀려드는 일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타이페이를 가기 위해서 기상시간까지 앞당기려니 여간 곤혹스러운게 아니다.


셋째날의 아침은 그 시작이 부산스러웠던 것은 물론, 자비롭지 못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대만 땅이 한국보다 작다고 하지만 동네 편의점에 소주 사러 갈 때 처럼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타이페이가 아니다. 늦어도 오전 열 시에는 GPS 좌표가 타이페이 한복판을 가리키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던 바, 급행 열차를 타기 위해서 그렇게 바쁜 마음을 재촉했건만 우리를 반긴 것은 여객전무님의 환영 인사가 아닌 전광판에 선명히 새겨진 '매진' 두 글자 뿐이었다.



천안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울까지 가 본 적이 있다. 딱딱하고 미끌거리는 불연 소재의 플라스틱 의자는 쉴 새 없이 짜증을 부르고, 오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은 눈 잠깐 붙이는 별 것 아닌 일조차 대단한 노력을 들여야 성취할 수 있는 무언가로 만들어 버린다. 4년 반 만이다. 머나먼 대만 땅, 타이페이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그 유쾌하지 않은 경험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딱히 방법이 없었기에 하릴없이 주는대로 표를 받았는데, 한시간 이십분을 더 달려야 된단다. 원래 타려고 했던 것이 하이퍼 루프쯤 되는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기차에 오르자마자 그 고무줄과도 같은 시간의 의미를 온 몸으로 이해해버렸다.


지하철과 다른 점이라고는 지하로 다니지 않는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나와 여자친구는 덕분에 대만 서부 해안에 위치한 거의 모든 행정구역의 이름을 빠짐없이 눈에 넣을 수 있었다. 혹시 까먹을까봐 걱정이 됐는지 1, 2분씩 기다리면서 차내 방송으로 반복 학습을 시켜주시니 고맙기까지 하다. 기차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하려 했던 원래의 계획이 완벽하게 틀어진 것은 덤.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칼같은 정시 운행이다. 기관사를 벌써 인공지능으로 대체한 것인지 기차는 일분의 지연이나 조착도 없이 정확히 열 한시에 타이페이 역의 4A 플랫폼에 멈춰섰다.



하루를 제대로 열기도 전에 만신창이가 된 심신을 다스리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냉큼 다이어리를 열고 찍어버린 도장. 이 글을 쓰면서 제대로 살펴보니 묘사가 세밀하고 미려한 것이 남겨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아무것도 알아본 것이 없고 알아볼 생각도 딱히 없었다. 교통수단을 두고 벌어진 한바탕의 소동에 기진맥진한 우리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더 비싸고 맛있는 점심 한 끼로 지난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비싸고, 조금 더 있어 보이는 식당을 찾아 정처없이 헤매다 찾게 된 이곳은 '향식천당'이라는 이름의 뷔페. 지하철 9호선 플랫폼만큼 북적거리는 모습에 첫번째 합격 도장, 인당 한화로 3만원 가까이 하는 대만 치고는 결코 가볍지 않은 가격에 두번째 합격 도장. 있어 보이고, 맛이 보장되는 듯 하고, 비싸기까지 하다. 고민의 여지 없이 줄의 맨 끝으로 향하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나름 여행객들에게도 유명한 곳인 듯 하다. 3만원이 안되는 가격이지만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고 대체로 맛도 괜찮았기에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런고로 먹는데 정신이 팔린 덕분에 제대로 남긴 사진이 얼마 없다. 한 가지 더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이곳은 맥주가 무한히 제공된다. 정말이지 흡족함이 차고 넘치지 아니할 수 없다. 당연히 가격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괜히 돈을 번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입사 초기에 멘토 선배와 밥을 먹으라고 나오는 비용이 있었다. 비싼 식당을 찾아가서 한번에 계좌를 비워내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참으로 돈 쓸 줄 몰랐던 나와 선배는 동네에서 육회만 주구장창 먹어댔는데, 그런 우리도 가끔씩 마음에 바람이 들면 가는 데가 있었다.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뷔페 중 하나였던 그곳은 무엇보다도 양송이 스프가 참 맛있었다. 스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출근도장 찍듯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찾아 먹었고, 아주 최근까지도 내가 먹어본 중에는 가장 맛있는 스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패스트리 콘 스프를 먹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스프를 다시 먹기 위해서라도 나는 향식천당을 다시 찾아가고 싶다. 스프라는 단어가 끝도 없이 나오는 것이 문장의 가독성을 심하게 해치는 것 같아서 고민이 되지만 그런건 아랑곳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곳의 스프는 너무나 맛있었다.



콘 스프와 함께한 즐거운 식사 시간이 끝났다. 밥을 먹으면서도 용케 다음 발걸음이 향할 곳을 찾아냈다. 타이페이의 옛날 모습이 남아있는 '디화제'라는 거리가 우리의 다음 목적지. 걸어서 삼십분 남짓한 거리였기에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갑옷을 입고서 부동자세로 서있는 이 빨간 녀석은 파란불로 바뀌면 무섭게 달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서 신호를 기다리는 것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다.



처음 대만에 도착했을 때 사방 천지에 빼곡하게 들어찬 오토바이 무리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타이페이 역시 다르지 않다.



한국으로 치면 경동시장 정도 되는 이곳은 약재상과 골동품상이 즐비하다. 그 말인 즉 뭔가를 사고 싶어도 취급하는 품목이 조금 애매하다는 뜻. 세상 한약재는 모조리 구경하고 온 듯 한데 기념품 파는 곳을 제외하면 들어갈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그래도 대만의 옛 모습을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는 몇 안되는 곳이라서 이곳만이 가지는 특유의 고즈넉함이 있다. 다음에 타이페이를 찾아도 이곳에 올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면 세상은 넓고 가지 않은 곳은 아직 많다. 대답과는 별개로 걷는 것 만으로도 눈요기가 되는 독특한 곳임에는 분명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분위기와 냄새에 나도 모르게 이끌렸다. 고양이가 어물전 그냥 못 지나친다더니, 아주 생뚱맞게 원단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대만은 어떤 원단들이 인기가 많은지 궁금해서 한바퀴 돌아보았는데 화려한 색감과 큼지막한 패턴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봄이 오고 있나보다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대만에는 대형마트를 찾기가 쉽지 않다. 마침 까르푸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잠시 들러보았다. 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자들을 주섬주섬 주워담고는 잠시 카페에 앉아 달궈진 다리를 가만히 놀려본다. 감귤차와 커피를 한 잔 시켰는데 처음 먹어보는 상큼한 맛의 감귤차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국적인 대만 거리를 걷고 있겠다, 간만에 날씨도 화창하겠다 여행하는 동안 미뤄둔 가방 사진을 잔뜩 찍었다. 여행 가방을 만드는 일의 장점은 내가 매일 메고 다니는 가방을 찍기만 하면 제품 사진이 되기 때문에 별도의 소품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하루의 시작이 늦어버린 탓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시곗바늘이 저녁 시간을 향해간다. 조금은 급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타이페이 101로 움직였다. 대만을 무대로 한 많은 창작물에 개근하다시피 하는 이곳은 유독 지진과 얽힌 사연이 많은 건물이다. 건물이 완성되기도 전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크레인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댐퍼'가 설치된 고층 건물이기도 하다. 댐퍼는 지진이나 바람 등으로 인하여 건물에 생기는 진동을 상쇄하는 장치물의 일종으로써 이곳에 설치된 것은 5.5m의 지름에 무게는 660t이나 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전망대보다 이 댐퍼를 더 보고 싶었지만 시간도 마땅치 않았고, 높은 곳에 가는 것을 끔찍히도 싫어하기 때문에 그 꿈은 이루지 못하였다. 아쉽기는 하지만 고소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면 어차피 이루지 못할 꿈이긴 하다.



이곳에 온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저녁을 먹기 위함이었다. 홍콩에 가서 IFC에 위치한 팀호완을 가는 것이 딱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평소라면 사람으로 터져나갈 것이 너무나 자명한 곳의 음식점을 갈리가 없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선택지가 마땅치 않았다.



역시나 미어터진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만에 왔는데 딘타이펑은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감내하기로 했다.



딤섬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그야말로 공장처럼 딤섬을 찍어내고 있었다. 하루에 수 천 판은 족히 쌓일 것 같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주문 속도가 버겁게 느껴질만큼 쉴 새 없이 손님 상에 올려지고 있었다.



탄탄면 한 그릇과 샤오롱빠오 한 접시, 이름을 모르는 만두 한 접시와 시금치 볶음을 시켰다. 한국에서도 맛있게 잘 먹었던 음식이 본토에서라고 맛이 없을리가 없다. 거기에 더해 네 종류의 음식을 시켰는데 한화로 이만 오천원도 하지 않는 가격표까지 바람직하기 그지 없다. 아주 많은 딤섬을 먹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추천할만한 곳인지 객관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실패할 일은 없는 곳이 아닐까 싶다.



기분 좋게 저녁도 해결하고 나니 하루의 끝이 보인다. 나와 여자친구는 중정 기념관에서 타이페이 여행의 방점을 찍기로 했다. 이미 폐장 시간을 넘어서긴 했지만 타이페이 역으로 가는 길이었고 대만 고궁 박물관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한국으로 치면 세종 문화 예술회관 정도 되는 국가음악청과 마당이 널찍한 공원을 벗한 중정기념관은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요일 밤의 해방감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단청 빛깔의 처마가 한국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 이 건물이 국가음악청이다. 거의 동일하게 생긴 두 채의 건물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내부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입구에서부터 표 검사를 워낙 삼엄하게 하는 통에 그러지는 못하였다. 여유롭게 타이페이로 여행을 오게 된다면 괜찮은 공연에 맞춰서 한 번 쯤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처마 아래서 올려다 본 하늘이 참 평화로웠다. 의도와는 다르게 숨가쁘게 앞만 보고 달리는 여정에 지치는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기대치 않게 맞이한 쉼표여서 그런지 더 마음이 푸근하였다.



대만의 국부로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장제스인 만큼 그를 기리는 재단의 위용 역시 어마어마하였다.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폐장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워서 앞까지 걸어가 보았다. 계단을 끝까지 올라 뒤돌아 서니 또 한 번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분명 방금 전까지 포항 스틸러스 홈구장처럼 끓던 곳이었는데 이곳은 대나무숲 가운데 서있는 것 처럼 바람 소리만 스치운다. 그 적막이 썩 마음에 들었던 나는 조용히 선 채로 달밤에 가는 구름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 보았다.



다시 타이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타이페이를 다녀오며 얻은 한 가지 교훈이 있다면 대만에서 기차를 타고자 한다면 꼭 예매를 해야 한다는 것. 오전에 타이페이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는 표를 끊었는데 그나마도 지정석이 아니었던지라 두 시간을 속절없이 서있어야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야무지게 고생스러웠던 셋째날의 보름달이 숨가쁘게 중천을 넘어가고 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었다.





어김없이 예쁘다. 타이페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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