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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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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박인혁 May 03. 2018

여행을 가다. 대만 타이중, 네번째

타이중, '18.03.07(수) ~ '18.03.11(일)

넷째날 아침이다. 타노스를 향한 가모라의 마음처럼 굳게 잠겨 열릴 생각이 없던 대만의 하늘이 마침내 맑은 얼굴을 드러냈다. 보송하게 스치는 바람과 햇살이 온연한 봄을 느끼게 한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다.

전날의 고생이 과했기에 숙소를 나서는 시간이 조금 늦었다. 점심 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분침을 잡아 세우고는 집 앞 우육면집으로 허기진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이름 뿐 아니라 중화권에서는 흔하게 먹는 것이기에 한 번 쯤 접해봤을 법 한데 경험이 없던 음식이다. 메뉴판이 온통 중국어로 되어 있어서 주문에도 꽤 애를 먹은 우육면은 고생의 값어치를 차고 넘치게 하고 남았다. 갓 요리해서 아직 뜨끈한 소고기 장조림 국물에 면을 말아냈다고 표현하면 딱 맞을 것 같은 맛인데, 국물이 진하기도 하거니와 고기 양도 실하다. 게다가 영수증을 받아들고 나면 혹시 주인 아주머니가 계산을 실수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로 가격까지 참하다. 한 그릇에 단 돈 삼천원, 세 끼를 다 먹어도 하루에 만원이 안된다.

사람 살기에도 비좁은 이 조그마한 섬나라에 소 키울 땅은 어디에서 났을까 싶지만 우리가 고민할 일은 아니다.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소고기가 들어간 국수 한 그릇이 삼천원이라는 것이다.

낭중지추라,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은 누구나 비슷한가보다. 하나 둘 채워지는 자리는 어느새 꽉 차버렸고, 점심시간이 되어 밀려드는 인파는 무서울 정도. 혹시나 싶어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근방에서 꽤 유명한 곳이다. 기분 좋게 열린 하늘에 더한 세렌디피티, 시작이 좋다.

이곳보다 맛있는 곳이 더러 있을테지만 3천원의 가치를 체험하고 싶다면 아래의 주소로 찾아가보자. 아무리 맛이 없다고 한들 이 가격이라면 후회하기도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

夫子牛肉麵

주소 : No. 193之1號, Section 2, Shuangshi Road, North District, Taichung City, Taiwan 404

영업시간 : 11:00 ~ 21:00

가격 : 3,000 ~ 4,000원 (우육면 한 그릇)

여행 내도록 한국에 모셔두고 온 패딩을 생각나게 하는 흐린 날이 계속되었기에 후끈한 공기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떤 목적지도 만들지 않은 채 그냥 걸어보기로 한다.

아직은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고 있어야 할 평화로운 토요일의 점심시간이었지만 이렇게나 청명한 하늘은 현지인들도 낭비할 수 없었던 듯 하다. 어딘가로 떠나는 느긋한 행렬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한국에서 여행왔냐고 물어오는 동네 어르신과 기분좋은 수다를 나누면서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팝콘을 도가니째로 튀겨내는 듯 폭죽 소리가 요란하다. 어렵지 않게 발견한 소리의 진원에서는 마을 잔치가 한창인 듯 하다. 떨어질 리 만무하지만 혹시나 묻을지 모르는 콩고물을 찾아 호기심 어린 발걸음을 옮겨본다.

마을 자치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나눠먹는 한 무리의 인파 너머에는 향을 든 사람들이 한 해의 복과 덕을 기원하기 위해 사당을 기웃거린다. 참 평화로운 광경이다. 중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알았다면 말이라도 한 번 섞어볼텐데 그러지 못해 참 아쉬운 순간이다.

길을 걷다 만난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광경. 이미 여러 번 본 적 있는 방송이라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 기분탓일 것이다. 괜스레 호기심이 동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대낮이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직접 못과 리벳을 박고 망치질하며 이 공간을 가꾸었을 카페 사장님은 분명 섬세하고 세심한 사람이었으리라. 그러지 않고서는 반복되는 풍경에 지루함을 느끼던 찰나와 이 공간의 등장이 그토록 완벽하게 동기화 된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하여 이 카페로 말할 것 같으면, 글쎄다. 모른다. 들어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미안해서 사진이나마 예쁘게 남겨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인 듯 하다. 언제 이곳을 또 찾게 될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꼭 저 철문을 열어젖혀야겠다. 부디 문 닫지 않고 오랫동안 이 자리에 남아주기를.

대만 사람들과 종교는 일상에 무척 밀접하게 닿아있는 듯 하다. 동네 곳곳에 사당과 재단을 만들어 그들의 신을 모시고 있을 뿐 아니라 조계종 본산이라 해도 믿을 법한 커다란 규모의 사원도 도시 곳곳에 위치해 있다. 원보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 역시 그 중 하나로서 타이중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절에 가면 으레 보이는 삼신불이나 관세음보살이 없기에 무슨 종교의 사원일까 궁금하여 찾아보니 1700년대에 지어진 도교 사원이라고 한다. 시간이 애매했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예를 올리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페이스북 팔로워가 7천명이나 된다. 한가지 놀라운 점은 10층 가까운 높이의 굉장히 큰 불당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중에서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사원이라는 것.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향을 피우고 참배를 드려볼까 싶었으나 차마 석가모니와 맺은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조용히 사원을 빠져나와 가던 걸음을 계속 옮겨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외투 생각이 간절했지만 오늘은 더이상 걷어낼 옷도 없는데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걸칠 것이 없어서 벌벌 떠는 것 보다야 낫기는 하다만 계속 걷는 것은 무리. 결국 버스를 타기로 했다.

타이중의 버스에는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일정 거리 전까지는 요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을 잘 활용 한다면 한 시간 떨어진 공항까지도 요금을 내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물론 일부러 시도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할 짓이 못된다.

창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대만의 버스는 따가운 볕 아래에서 그 위력이 배가 된다. 후끈하게 달궈진 공기를 진정시키는 일은 에어컨으로도 역부족이다.

여행 중에는 낮술이 빠질 수 없다. 부디 달리는 찜통과 사투를 벌인 보람이 있길 바라며 찾은 이곳은 ZHANG MEN이라는 이름의 수제 맥주 가게. 이번 여행에서 몇 안되게 계획된 일정 중 하나였던 만큼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안고 가게 문을 열었다.

꽤 많은 종류의 맥주를 취급하고 있다. 대낮이라 그런지 손님이 많지는 않았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여행객 몇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를 축내고 있었다.

좀 여유롭게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이 좋은 공간을 그냥 허비할 수는 없었다. 가방을 꺼내들고,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여행지가 곧 일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여행 가방을 만드는 것의 아주 큰 장점이지만 바꿔 말하면 여행지에서도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격은 꽤 나가지만 맥주는 훌륭했다. 매일이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의자가 조금만 더 편했다면 정말 헤어나오기 힘든 여유와 한가로움의 늪에 빠질 수 있었을텐데, 그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충분히 즐겁다.

하루종일 걸었더니 이른 시간임에도 허기가 들기 시작한다.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한 번 발걸음을 재촉한다.

대만은 꽤 창의적인 나라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분명 빠른 승진을 거듭했으리라. 아마 승진이 너무 빠른 나머지 이른 명예퇴직도 함께 선물받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만.

이미 잔뜩 화가 나서 요동치는 위장을 조금만 더 붙잡아두기로 했다. 타이중 뿐 아니라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디저트 가게 중 하나인 궁원안과를 들러야 했기 때문에.

이름이 병원스럽다고 느낀다면 맞다. 1900년대 초, 대만의 일제강점기 동안 궁원'안과'로 쓰이던 건물을 2010년 즈음 '일출'이라는 업체에서 인수하여 디저트 가게로 용도 변경한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작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 독특함은 꽤 독보적인지라 벌써 대만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리고 그 명성에 걸맞는 세계구급의 가격 덕분에 사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개보수를 한들 백 년의 세월을 완전히 거스르기는 힘들겠지만, 그 나름의 고풍스러움이 있기에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번 쯤은 가볼 만 한 곳이다.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픽셀 하나 하나에 고즈넉함이 차고 넘치는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 생각보다 많지 않다.

참고로 이곳은 와플과자 위에 담아주는 아이스크림이 아주 유명하다. 8천원 정도면 세 덩어리를 얹어준다고 하니 관심이 있다면 한 번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나는 먹지 않았다. 8천원이면 오전에 먹은 우육면 곱빼기가 두 그릇이다. (돈 때문에 안 먹은 것은 아니다. 줄이 너무 길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길고 긴 줄)

궁원안과는 여의치 않으니 아쉬운대로 와플이라도 한 입 하기로 한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땅콩버터와 좋아하는 와플이 만나면 무엇이 이길까 조금의 호기심을 풀 수 있는 기회였다. 결과는 땅콩버터의 근소한 승리.

첫 날 점 찍어둔 식당을 향하는 길목에 발견한 한 무리의 사람들. 무얼 하나 싶어 기웃거려보니 주말을 맞아 출판단지에서 바자회가 열린 듯 하다. 와플 덕분에 당장에 급한 불도 껐겠다 급할 것도 없겠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둘러보기로 한다.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았으련만, 이미 장이 파한 분위기다.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어수선하게 펼쳐진 천막 사이를 뚫고 가던 길을 재촉한다.

한참을 걸었다. 첫날부터 눈여겨보던 이곳을 대만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저녁이 되어서야 찾게 되었다.

이곳은 소고기를 얹은 면과 밥을 파는 식당이다. 가족 단위의 외식객들이 많이 보였는데 동네에서는 꽤 유명한 곳인 듯 했다. 허름하고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주문을 받자마자 순식간에 손님 상에 올려지는 음식부터 손님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말끔하게 치워지는 책상까지, 모든 것이 자동화된 공장처럼 쉴 새 없이 체계적으로 굴러간다. 작게나마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언젠가 이곳을 다시 한 번 찾아서 보고 배우고 싶은 정도였다.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공급자 뿐 아니라 수요자에게도 여러가지의 이점을 가져다준다. 무한정 가져다 먹을 수 있는 샐러드와 모닝빵, 스프 역시 그 효율화의 산물 중 하나인데 무엇보다 샐러드에 뿌리는 빨간 소스가 정말 맛있었다.

생긴 모습이 조금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정말 훌륭하다. 어린 입맛에는 그야말로 흠잡을 것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한끼가 아닐 수 없었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단맛이 도는 소스에 절여지다시피 한 고기를 크게 한 점 잘라 계란 후라이도 그 위에 얹어 면과 함께 입으로 가져가면 그저 행복해서 웃음만 나올 뿐이다. 대만에 갈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다시 찾고 싶을 정도로 나의 입맛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저격한 이 음식의 이름은,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충효 야시장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테니 나는 이곳을 반드시 다시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