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의 악연
무엇인가에 대한 결핍이 야기하는 방어기제는 가슴 깊이 자리한다. 마치 습관처럼 행동이나 생각, 성격 등에 이 기제가 작용하고 묻는다. 어릴 적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에겐 부모의 사랑에 대한 방어기제가, 친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기제가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나의 경우 가난이 그랬다. 돈에 관련해서는 나답게 살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기제가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고 거의 모든 선택에 관여한다. 이번 글에서는 가난에 지독하게 엮여버린 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돈에 대한 걱정은 중학교 입학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즈음 아빠가 벌어오는 수익이 현저히 줄었고, 우리는 삼남매였기 때문에 이곳저곳 돈이 많이 들어갔다. 부모님은 돈에 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셨지만 다 알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고등학교를 기숙사 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기숙사비에 학비까지, 들어가는 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기에 인터넷 강의 구매를 위한 돈 같이 추가적인 비용을 요구하려니 정말 인터넷 강의를 듣고 싶다는 그 한마디 하는데 항상 전화로 말을 빙빙 돌려서 했던 기억이 난다.
용돈의 경우엔 더 심했다. 나는 매달 일정 금액씩 받는 게 아니라 돈이 떨어지면 보내달라고 하는 식이었는데 이건 뭐 집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랬다. 고정적으로 보내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으니 필요하다고 하면 어떻게든 구해서 조금 떼주는 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보니 용돈 달라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혹시나 늦게 받거나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 5만 원 정도씩은 부풀려서 말하는 나쁜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비상금의 개념이긴 한데, 얼마 남았냐는 말에 항상 그 정도의 금액은 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졸업이라도 정상적으로 했으면 모르는데, 졸업을 2~3달 앞두고부터는 학비나 기숙사비를 내지 못해 제적과 같은 형태 혹은 기숙사 퇴거와 같이 꽤 충격이 큰 비정상적인 결말을 맞을 뻔했다. 다행히 고3 담임선생님이 대신 내주시고 나중에 갚아드리는 방식으로 해결하긴 했지만, 한창 학업 이외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할 시기에 너무 많은 악재가 겹친 게 아닌가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돈을 버는 것이었다. 물론 대학도 중요했지만, 이제부턴 생활비를 내가 벌어서 써야 했기 때문에 스키장에 강사로 취직을 하고 열심히 일을 했다. 당시 별 고민도 없이 한 선택이라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고 바보 같았다.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쉬거나 놀기에 바빴고 나처럼 바로 일을 하는 애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첫 월급은 멋도 모르고 주는 대로 받았다. 나만 그렇게 받았던 것도 아니고, 처음 해보는 일이기도 했고 일 자체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냥 받았다. 당시 기억으로는 최저시급이었고 한 120~130만 원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첫 월급이니 선물도 잔뜩 사고, 분위기에 휩쓸려 야식도 먹고 하다 보니 저금은 많이 못했다. 2달 반 정도 일하고 한 150만 원 정도 모았었나. 그래도 숙식 제공되는 합숙생활을 하며 알뜰하게 모았다.
그렇게 혹독한 12월이 지나고, 1월쯤 되니 대학 합격통지서가 도착했다. 서울 모 대학이었는데 말문이 턱 막힐 만큼 비싼 입학금과 등록금에 좌절했다. 물론 학자금 대출이라는 제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못 다닐 것은 없었지만 막연히 4천만 원이라는 빛을 지고 시작해야 하는 미래가 많이 두려웠다. 이미 고등학교 때 돈의 쓴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섣부른 선택을 할 순 없었다. 이미 원서를 다 써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선택지가 없었다. 재수밖에. 다시 해서 국립대를 가면 된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하면 거의 무료로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키장에서 알바를 하며 재수를 준비했다. 휴가를 내고 재수학원에 원서를 내러 갔다. 그리고 너무나도 빠르게 2번째 좌절을 맛보게 된다. 무슨 학원비가 내 고등학교 학비보다 비싸지? 그렇게 유명한 학원도 아니었는데도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는 것을 듣고 덜컥 겁이 났다. 재수는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닌데 독학재수를 하다가 영영 대학 못 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다 내 수능성적으로 70%까지 학원비를 할인해준다는 곳을 찾았다. 최우등반에 들어가서 좋은 성적을 받아 학원을 홍보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학원비가 월 80만원 안팎이었는데, 30%인 25만 원가량만 내고 다녔다. 운 좋게 내가 모아둔 돈이 있어서 그걸로 학원비를 충당했다. 물론 트레이드오프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 왕복 4시간 거리에 있는 노량진이라 정상적으로 다니려면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 1시에 자야 했다. 또한 식비나 책값, 특강비 등은 고려하지 않은 금액이었던지라 다들 식권으로 밥을 먹을 때 나는 도시락을 싸야 했고, 특강은 어림도 없었다.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8월 즈음, 수능을 3달 남겨두고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처구니가 없다. 어쩜 운이 없어도 그렇게 없지.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빠는 사무실로, 엄마와 누나 동생은 각자의 친구 집으로. 나는 학원 앞 고시원으로 나왔다. 계중에 나는 배려를 받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거의 3년 간의 우리 집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약 한 달 정도 뒤에, 우리 집은 다시 모였다. 우리 가족은 5명인데 8평 원룸으로 이사했다. 어떻게든 다시 모여야 했으니 보증금도 겨우 모았다고 들었던 걸 생각하면 부모님으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도 고시원에서 나와 이 원룸에서 왕복 4시간 통학을 다시 시작했다.
당시 원룸 생활을 회고해보자면, 우리 가족 표정이 많이 안 좋았다. 밤에 자려고 다섯 명이 모두 누우면 원룸 바닥이 꽉 찼다. 눈을 뜨면 얼른 원룸을 벗어나려 각자 공부나 일하러 밖에 나가려고 애썼다. 그 와중에 주부였던 엄마는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원룸 바닥에 앉아만 있으려니 우울증 초기증세 같은걸 보였던 것 같다. 나도 느꼈고. 그렇게 한두 달로 끝날 줄 알았던 지옥 같은 원룸생활이 자그마치 2년이 넘게 이어졌다.
상황이 이랬지만, 수능은 적당히 봤다. 원했던 학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구나 아는 지방국립대학에 무난히 합격했고, 나는 또 스키강사 일을 하면서 대학 준비를 했다. 하필 학교가 부산에 있어서 새터나 오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일을 해야 했기에 1박 2일이나 2박 3일 일정을 소화할 수 없었다. 방학 때 기숙사비를 벌어야 주거가 해결되기 때문에 일을 멈출 순 없었다.
그 후 기적적으로 아빠 일이 좀 풀려서 전세지만 아파트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야 뭐 쭉 기숙사에 살았으니 별 감흥이 없었지만 우리 가족이 정신병 걸리기 일보 직전에 구출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고 삶이 윤택 해진 건 아니었다. 가족은 물론이고, 나도 어처피 대학생활 내내 돈걱정을 해야 했으니. 온 가족이 생활비를 위해 일을 했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가족이 생존을 해야 했기에 누나와 나는 각자의 월급의 일부를 집 생활비 명목으로 보낸 달도 많았다.
나는 당시 돈 때문에 직업의 측면에서 조금은 안 좋은 선택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전반적으로 잘한 선택이기도 한데, 바로 학군단에 지원한 것이다. 군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고, 학군단에 지원하면 3~4학년엔 떨어질 확률이 높은 기숙사에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었으며 이후 군생활 동안 돈을 조금 모아나올 수 있었다. 그 대가로 3, 4학년 대학생활을 바치고 공대에서 최악으로 여겨지는 졸업 후 공백기 2년 반을 얻었다. 물론 장교라는 경험을 했고, 돈도 꽤 모아서 나왔기 때문에 나쁘진 않았다.
아직도 이 생활이 끝난 건 아니다. 여전히 부모님의 경제적 능력은 집안을 지탱하기에 부족하고, 갚아야 할 빛이 많다. 전세 거주기간이 지나면 이사를 가야 하는데 이에 대한 계획도 없는 상태다. 한 달 벌어 그 달 살기에 급급해 저축은 꿈도 못 꾸고, 제일 중요한 노후는 전무한 상태다. 솔직히 자녀 된 입장에서 벌써 걱정이 되는 부분 중 하나다.
나는 장교생활을 거쳐 개발자로 벌써 2년째 일하고 있다. 그 사이에 돈을 착실하게 모으고 약간의 투자를 더해서 또래에 비해 조금은 많은 돈을 모았다. 기숙사비나 생활비 명목으로 한 학기에 100만 원씩 받았던 학자금 대출이 800만 원 정도 있었는데 이 또한 상환했다. 그나마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줄곧 느꼈던 돈에 대한 압박이 조금은 사라지고 있다.
일정 금액 이상이 통장에 항상 있기 시작한 후로부턴 돈에 대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 2000만 원 정도 모였을 때였는데, 이때부턴 옛날에 알바 월급 5~60만 원 입금되던 날처럼 두근대지 않았고, 2~3만 원짜리 책 한 권 사는데도 벌벌 떨지 않았다. 최근엔 내 생에 최초로 3주짜리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가슴 한편엔 가난에 대한 방어기제가 자리 잡고 있다. 가계부를 일단위로 착실히 쓰고, 공격적인 투자는 지향하며 부업거리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또래에 비해 경제적으로 앞서 나가고 있지만 이를 여유로 인식하지 못하고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씀씀이가 헤픈 것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나는 아마 통장에 1억, 10억이 있어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을지도 모른다. 돈에 대해서 만큼은 단 한순간도 낙관적인 스탠스를 취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요즘도 과거의 지독한 가난이 촉발한 트라우마가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내 생각과 선택을 좌우한다.
아마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게 되겠지.
사실 이 방어기제라는 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싫어했던 가난으로 다시는 돌아가기 싫기 때문에 미리 여러 계획을 세우고, 돈만큼은 철저하게 관리한다. 과거에 몸으로 확실히 배운 개념을 자동화하는 로봇을 몸에 이식해서 공생하는 느낌이다. 이 과정에서 다른 가치들과 복합적으로, 같은 선상에서 비교를 하다 보니 안 좋게 비칠 수 있지만 그렇게 싫진 않다.
각자 하나쯤은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성격이 아님을 인지하고, 역으로 잘 이용한다면 남들에 비해 하나의 강점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