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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 Dec 12. 2022

ROTC 후기

잘 생각하자.

저는 2020년 6월 30일 부 육군 중위로 만기 제대했습니다. 전역일을 마주해본 어떤 성인 남성이라면 아마 마찬가지겠지만 그날의 시원섭섭한 느낌을 지금 느낄 순 없습니다.


전역 날 동기 중위들과 함께 대대장님께 신고하고 터미널에서 같이 소머리 국밥 한 그릇씩 먹고 헤어지는데, 자대에 처음 배치되던 날 내렸던 터미널의 모습이 오버랩되던 것이 떠오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대학교 2학년 때, 카추사에서 떨어진 후 아무 생각 없이 캠퍼스를 거닐다 ROTC를 결심했습니다. 무슨 사명감이 있어서 지원한 건 아니었고, 기숙사 문제가 컸던 것 같아요. 군문제도 해결하고, 고민거리였던 기숙사도 해결된다니.. 생계가 어려운 경기도민이지만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던 제가 할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이었다고 생각해요.


하필 인기 없던 학군단이 그 당시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 때문에 경쟁률이 사상 최고였습니다. 1:5 정도? 여차저차 그렇게 필기시험, 체력 시험, 면접을 뚫고 어쩌다 후보생이 되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후보생 생활은 정말 별로였습니다. 머리를 밀어야 했고, 병정놀이를 하는 꼬맹이처럼 단복을 입고 007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으며 방학마다 훈련을 가야만 했다. 훈련도 너무 시간낭비 같아서 매일이 지옥 같았습니다. 


그렇게 2년이 흐르고 임관식을 거쳐, 소위가 되었습니다. 돌아보아도 별로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인데, 부모님이 달아주는 계급장은 정말 먹먹하고 짜릿했습니다. 그거 하나 달아보려고 버텼던 시간들, 누군가는 여행도 다니고 취업준비도 했을 시간이었을 텐데.


운이 안 좋았다

 저는 조금 힘든 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매일이 실전인 부대들이 의례 힘듭니다. 할 일도 많고, 점검이나 평가도 많이 오기도 하고, 그만큼 긴장하고 있는 부대이기 때문에 상급자들부터 군기가 잡혀 있어요.


 처음 소대장 직급을 부여받고는 일개 소위가 맡을 수 있는 일인가 싶은 업무를 할당받았고, 그보다 더한 책임을 받았습니다. 2년 차가 되어 중위로 진급하고 직급도 변했는데, 일개 중위가 맡을 수 있는 일인가 싶은 업무를 받았고 또한 그보다 더한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아실 분은 아시겠지만 초급간부로 불리는 3가지 계급인 소위, 중위, 하사는 군에서 마치 소모품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특히 소위와 중위는 간부로서의 책임에 더해 지휘에 대한 책임이나 업무에 대한 책임이 더 막중합니다. 한마디로 책임이 있는 소모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게 없진 않다

그래도 사회 초년생으로 나아가기 전에 이곳에서 사람과 업무 프로세스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60~70명 되는 성인 남성들을 이끌어보기도 했고, 대대장 직속 참모로서 커다란 집단을 움직이는 축이 되기도 해 봤습니다. 쓸모없는 시간 같은 건 없으니까, 모든 건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경험이지 않은가.


또한 그때 내재화해서 지금도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 계획에 대한 관점은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돼버렸어요. 군은 계획을 굉장히 철두철미하게 지킵니다. 작은 이벤트 하나에도 계획-실행-평가 문서를 만들어서 아카이빙하거든요. 



이제 구체적으로 장교생활의 장단을 한번 적어볼까 해요. 20년 전역자의 시각인걸 고려해주세요.


장점

사람

 입단부터 입단 동기, 선배, 교육기관 동기, 자대 동기 및 사람들 등등 거의 5년 동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모두는 아니고, 그중 당신과 마음이 맞는 모든 이가 인맥이 됩니다. 그 밖에도, 사회에 은근히 많은 사람들이 장교 출신인지라 만약 서로 알아본다면 좋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장점이 마냥 좋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점조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고, 정치 질의 주축이 될 수도 있어요. 마냥 좋은 사람만 있진 않으니까 이건 본인의 역량에 맡깁니다!



후보생 때 받는 돈은 빼겠습니다. 푼돈이니까.


 소위로 임관하면 그 달부터 월 160 정도의 기본급이 나옵니다. 자대에 가면 추가 수당도 챙겨주고 명절 상여금이나 성과상여금도 있기 때문에 기본급은 적어도 이해합니다 (대부분의 동급 공무원이 저만큼 받거든요)


 저는 격오지 근무도 하고 초과근무도 밥먹듯이 해서 월평균 200, 격오지에 있을 땐 230에서 많으면 250까지도 받았습니다. 군인이 돈 쓸 일이 어딨겠습니까. 부대 안에 월세 2만 원짜리 숙소에 살다 보니 교통비도 없고, 주말에 잠깐 나가서 밥 먹고 커피 한 잔 하고 오는 게 다 인걸요. (물론 휴가 가서 팡팡 쓰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2년 4개월 동안 받은 돈을 어림잡아 계산해보니 퇴직금 포함해서 대략 6500만 원? 정도 되는 것 같던데, 저는 여기서 쓸 거 쓰고 학자금 대출 800만 원 싹 상환하고 순수 4000만 원 들고 나왔습니다.


 그럼 전역 후인 26살 6월의 한국 남성의 평균 자산을 생각해봅시다. 보통 21살에 군에 입대해서 23살에 전역, 24살에 복학 후 남은 3년 다니면 26~27살쯤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 나 이땐 빚이라도 없으면 다행인 나이예요. 부모님 지원조차도 없다면 아마 학자금이 쌓여있을 시기입니다.


이 나이에 3~4천만 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위안이 됩니다. 독서실비나 책값, 취업 준비하는데 드는 모든 돈을 내가 해결할 수 있잖아요. 취준을 경험해본 입장에서,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느긋하게 취준 할 수 있음은 정말 대단한 차이입니다.


능력

 저는 선천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학창 시절에도 조용조용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초장으로서 제가 아직도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어땠을까요?


 임무 수행하면서, 잘하든 못하든 많은 걸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외향적인 사람으로 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대로였지만 그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 다루는 방법이나 여러 사람들 간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있는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 같이 사소하지만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2년 차 참모장교를 할 때에는 대대장님의 직속 참모로서 기본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배웠습니다. 계획을 작성하고 그에 맞춰 이행하며 결과를 되짚어보고 발전방향을 논의하는 일을 1년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익게 되었고, 지금에도 영향을 주고 있어요.


인식

우리 또래 남성들에겐 장교가 그렇게 인식이 좋진 않아요. 워낙 말년 중위에게 당한 게 많아서 그런가. 하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근히 좋아합니다. 


학군단에 입단했을 때나 임관식 때, 부모님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도 많이 하시고 만나는 어른들마다 다들 좋은 선택 했다고 말씀해주신다. 장교 출신이라고 하면 뭔가 유시진 이미지 때문에 그런가 되게 깔끔하고 멋있게 느껴지나 보다 싶어요.



단점

경력 단절

 전역하고 나면 바로 백수이기 때문에 취준을 해야 합니다. 문과 계열에서도 영업직군은 좋은 스펙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전공이나 나처럼 공대의 경우 2년 반 동안 전공에 대한 아무런 이점이 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낭비한 것이기 때문에 굉장한 단점이 됩니다. 장교 출신 우대전형이나 장교 출신 특별채용 같은 전형은 정말 다 옛말입니다.


마치 처음 시작하는 것 마냥 맨바닥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전역 한 달 정도 전부턴 여유가 좀 생겨서 필요한 자격증도 취득하고 인터뷰도 보러 다니고 할 수 있긴 한데, 저처럼 부대가 한결같이 바쁘면 그렇기도 힘들어요.


복무기간

 아무리 장교로 가고, 개인 시간과 공간이 보장되더라도 군대는 군대다. 동기들과 이야기해보면 월급 받는 기간이 좀 줄더라도 다들 빨리 나오고 싶어 합니다. 옛날에 24개월, 21개월 하던 시절에야 장교로 가는 게 경쟁력 있었지 지금 18개월 vs 28개월 고르라면 당연히 18개월이지 않을까요. 심지어 병사들 월급도 많이 올랐고 휴대폰도 다들 쓰기 때문에 병으로 빨리 다녀오는 게 딱히 나쁘지 않습니다.


여긴 일터야

 용사들에게 군대는 큰 의미 없겠지만, 간부들에겐 일터입니다. 심지어 장교는 부사관들과 다르게 그 일에 책임이 부여됩니다. 물론 그들도 있긴 한데, 크지 않아요. 그런 일들을 하나하나 하다 보면 압박을 많이 받게 됩니다. 용사들은 수동적으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데 우린 그들을 통솔하거나, 그들이 먹고, 자고, 임무 수행하는 모든 걸 계획하고 예측해야 하는 일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업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도 군대를 갔다왔다라기 보다 엄청 힘든 조직에 일하러 갔다 온 기분이 들긴 합니다. 유니폼을 입는 조직도 많고, 이 정도 문화를 가진 특수한 집단들도 꽤 존재하니까요.




여하튼 힘들었습니다. 어떻게든 그 조직에 몸담아봤다면 알거에요. 어떻게 버텼나 싶습니다.


 허나 힘든 기억은 언제나 미화되기 마련이라고 했던가요, 약속의 그날이 오니 모든 게 눈 녹듯 사라진 것 같아요. 날 힘나게 해 준 사람들, 날 힘들게 했던 사람들 모두 이제 모두 기억 속에만 있습니다.


 그래도 누가 다시 2015년 봄으로 돌려줄 테니 그냥 현역병으로 다녀올래라고 묻는다면 100번 물어도 난 다시 장교의 길을 택하렵니다.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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