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n Thomas Dougherty
낸시 슬로님 애러니의 저서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에는 시인 숀 토마스 도허티의 시를 인용한 문장이 나온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챗GPT에게 그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다. 책에 인용된 문장은 그의 대표작인 Why Bother?(왜 애써야 할까?)라는 시였다. 시의 번역은 챗GPT가 아닌 책에 인용된 문장을 그대로 사용했다.
Because right now there is someone
out there with
a wound in the exact shape
of your words.
왜냐하면 지금
저곳에
당신의 이야기와
똑같은 모양의 상처를 지닌
누군가가 있으니까.
책에서는 이 시를 인용하며, 그렇기에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대단한 뭔가를 이루지 않았더라도, 자전적 에세이를 쓸 이유가 충분하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미 예전에 이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공감하기 어려운 경험에 대한 감정을 토로하는 글을 썼는데 자신도 비슷한 경험으로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며 공감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그 글을 썼기에, 나와 그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혼자만의 불행한 경험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난 내가 누굴 위해서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길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사람들에게 불행을 전시하고 파는 게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것이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어떻게 옅어지게 하고 인상을 바꾸는지 느낄 수 있었다.
Some days I feel like I’ve already died and this
is my afterlife.
Some days I feel the world trying to erase me,
the way water wears away stone.
Some days I feel I must write
just to say I was here,
that I existed,
that I mattered to someone,
even if they’re gone.
Some days I sit and talk to the dead
because the living don’t call.
어떤 날은 이미 죽은 것 같고
지금 이 삶이 내 사후 세계처럼 느껴진다.
어떤 날은 세상이 나를 지워버리려 드는 것 같다,
물이 돌을 닳게 하듯이.
어떤 날은,
내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말하기 위해
내가 존재했었다는 걸,
누군가에게는 중요했던 사람이었다는 걸 쓰기 위해
시를 써야만 할 것 같다.
어떤 날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전화를 하지 않기에
죽은 이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챗GPT가 알려준 그의 또 다른 작품이다. 한국에서 숀 토마스 도허티는 그렇게 알려진 시인이 아니기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제대로 잘 번역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어느 정도 뉘앙스는 맞는 듯하고, 시에 담긴 정서는 느낄 수 있다.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챗GPT에게 물어봤더니, 아래와 같이 답변해 줬다.
Sorrow (슬픔)이라는 단어 안에는 두 개의 알파벳 "O"가 있어요.
첫 번째 O는 시작되는 슬픔, 즉 상실의 순간일 수 있어요. 누군가를 잃거나, 무너지는 순간.
두 번째 O는 그 이후에도 끝나지 않고 남아 있는 슬픔, 즉 지속되는 애도와 공허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슬픔은 단지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 계속되는 존재의 형식”이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어요.
생성된 답변에 따르면, 그는 퍼포먼스 시인이라고 한다. 시를 종이에 쓰고 마는 게 아니라, 공연 무대에서 시 낭송을 하기에 음악적 언어와 리듬감을 사용하는 시를 쓴다고 한다. AI가 번역을 해주니 더 이상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이런 언어적 감성은 그 외국어를 배우지 않고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중간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다이렉트로 언어를 이해하고 느끼는 즐거움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감각이다. AI에 의존하며 스스로 외국어를 익히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늘어나면, 인간은 인간만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영역을 하나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