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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실은통한다 Jul 02. 2020

웬만하면 이 색(色)을 이길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음식 하면
뭐가 있을까? 감자와 호박, 두부까지 네모지게 썰어 보글보글 구수하게 끓여내는 된장찌개 VS 묵은 김치 송송 썰어 들기름에 달달 볶다가 돼지고기 넣고 푹~ 익혀 먹는 김치찌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혹은 ‘자장면이냐, 짬뽕이냐’를 잇는 세기의 대결 아닐까 싶다.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난 김치찌개를 더 좋아한다. 윤기 가득한 ‘묵은지 이불’ 걷어내면 그 속에 품어져 있던 돼지고기가 내게 말을 거는 듯하다.

“감히 니가 날 안 먹고 배겨?”

흰쌀밥에 김치 돌돌 말은 고기 한 점 올리면 감칠맛이 입안 가득 퍼지고, 칼칼~하면서 새콤 시큼한 국물 한 숟갈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랄까. 그 맛의 결정체는 단연, 묵은지(a.k.a 밥도둑) 일 것이다.

매년 11월 말 즈음이면 우리 집은 하늘이 두 쪽 나도 김장을 한다. ‘김장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직접 담그는 김치가 제일 맛있다는 엄마의 철학 때문이다.

김장이라는 건 어찌 보면 전투에 가까운 작업인데, 밭에서 배추와 무, 생강, 마늘 등 재료 채취부터 일이 시작된다.

각종 채소 일일이 껍질 다 까고 손질해서 빻고 썰고 채치고- 배추는 소금에 절이고... 가을볕에 말린 고추는 방앗간에서 빻아온다. 게다가 생새우 사야지, 멸치와 파뿌리, 양파 등 넣어 육수 따로 끓여야지,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그래도 예전-식당을 하던 시절-에는 기본 500포기 정도 담갔지만, 요즘엔 가볍게(?) 100포기 담그는 게 천만다행.

이른바 '김장대첩'. 품앗이 해주는 이웃들이 있어 참 고맙다. (나도 주요 일은 잘 못하기에 그저 거드는 수준이다;;;;)


배추 겹겹이 양념 가득 묻혀준 다음 가장 큰 겉잎으로 신생아 속싸개 하듯 폭~ 싸 내면 김치 한 포기가 완성된다. ‘어디, 올해 김장도 맛있나 보자!’ 생각하며 숭덩숭덩 김치 썰다보면 손톱 사이사이, 지문까지 배어버린 불그스름한 주황빛. 잠깐이었는데도 깊게 물드는 강력한 색이다.  

어쩌다 김치 국물 한 방울 옷에 떨어졌다 치면, 최소 30초가 지울 수 있는 골든타임.  만능 얼룩지우개라는 비*를 발라 비벼내도 김치 얼룩 묻은 옷을 깨끗이 되돌리기란 쉽지 않다. 특히, 묵은지는 더하다. 고춧가루의 위력도 있겠지만 ‘시간이 만들어낸 색’에는 그만큼 진한 내공이 담겨있다.  
 
맛을 느끼는 데는 후각보다 시각인 것일까. 나는 그런 김치 빛깔이 참 좋다. 강렬하고 선명한 그 색이 자꾸 내 눈을 사로잡아 매일 저녁 김치 음식을 차리게 유혹하는데,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먹을 때마다 늘 옷에 얼룩을 남긴다.

가슴엔 지워지지 않는 김치 얼룩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 매년 김장 때면 나불나불 입으로만 떠들고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던 동생이다.

“무채 좀 얇게 썰어야지”
“양념도 골고루 묻히고, 쫌!”
“만드는 김에 총각김치도 해줘. 나 한통 싸갈 거야”

그런데 참 이상하게, 동생의 잔소리는 마치 노동요처럼 없으면 허전한 무언가가 있었다. 4년 전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김장을 끝내고, 고기 덩이 푸짐하게 삶아서 수육 잔치를 벌였다. 그것이 동생의 마지막 김장이었다. 다음 해 김장 김치를 먹어보지 못한 채 동생이 먼 여행을 떠나버렸다.

묵은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더 깊어진다. 내 마음도 그렇다. 김치 국물 떨어지면 서둘러 지우듯, 내 눈물도 그렇게 얼른 닦아버리고 잊으려 했다. 이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적어도 나만의 공간에서는 말이다.

누군가 이런 슬픔을 묻히고 다니는 나를 불편해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묵묵하게 이해한다. 먹으면 냄새 밴다고, 옷에 튀기라도 하면 낭패라고 김치 음식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오늘 저녁엔 잘 익은 김치 한 포기 썰어 ‘두부김치’를 만들었다. 맥주도 빠질 수 없지. 나 혼자만의 밥상에서, 숨어있던 그리움과 추억을 꺼냈다. 두부김치 한 입에 마음속이 새콤달콤 ‘주황빛’으로 물들어 간다.

내 마음속에 두부김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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