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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와 세대갈등

by 인드라망


몇 달 전 나는 전역을 했다. 형은 전역한 내게 이렇게 자주 말한다. “요즘 군대가 군대냐? 내 때는 휴대폰도 없었는데. 휴대폰 있으면 군대 할 만하지. 캠프네 아주.” 나는 귀찮아져서 이젠 대답도 안 한다. 형 시절만해도 군대에는 가혹행위가 있었다. 이유 없이 선임에게 맞고 괴롭힘을 당했다. 삼촌이 군생활 할 때는 엄청나게 맞았다고 한다. 삼촌에게 요즘 군대에 대해서 말해주면 깜짝 놀란다. 그땐 상상조차 못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니까 말이다. 삼촌은 90년대 군번이고 형과 나는 각각 10년대, 20년대 군번이다. 군대는 매년 나아지고 있다. 내 선임들은 이렇게 말했다. “요새 애들은 참 편해.” 아마 선임의 선임도 그 선임에게 그 말을 했을 것이다. 그 선심의 선임의 선임도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 눈이 얼마나 높은지 몰라. 사서 고생할 줄은 모르고.. 편하게 살려니까 되는 게 없지.” 젊은 사람들은 이런 말 하는 어른들을 보고 꼰대라고 부른다. 386세대는 지금의 2030세대에 비해 취직이 쉬웠다. 전후 국가 재건을 위해 고용 시장에서는 노동 수요가 많았고 매년 국가 성장률이 10%이상을 육박하던 고성장 시대였다. 일하고 싶으면 바로 취직을 시켜주었다. IMF 금융 위기를 겪고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고용 시장은 위축되고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많은 대학 졸업자들이 화려한 스펙으로 무장했지만 속수무책이 되었다. 학위 인플레이션이 발생해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하기 어려워졌다. 일자리 경쟁은 심해지고 일하고 싶어도 취직이 안 된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젊은 세대가 바라는 것은 바로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현대 2030세대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는 주제의 단어는 ‘공정’이다. 개인의 능력과 성과에 따라 보상을 적절하게 지급하기를 젊은 세대들이 원한다. 경험과 짬이 아닌 능력과 성과에 따라 적절한 보상을 지급받는 것이 바로 젊은 세대가 말하는 능력주의이다. 실력에 따라 서 보상을 지급하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더욱이 2030세대가 능력주의를 외치는 이유가 따로 존재한다. 현대는 불확실성이 팽배한 시대이다. 확실함이 보장되지 않은 사회는 불안으로 가득하다. 예전 386세대 때 전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할 거란 낙관이 있었고 실제로 이는 먹혀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노력해도 충분히 보상받지 못할 수 있고 사회 계층 이동 가능성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고 자수성가해서 우리나라에서 상위 계층이 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예전 방식으로 성공하던 방법은 현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 더 어려워졌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가기가 버겁다. 그래서 불확실한 시대에 오직 기댈 수 있는 것은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 세대가 말하는 능력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마이클 샌델은 자신이 쓴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가 미국사회에서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역설한다. 자유시장경제에서 능력주의는 사람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나눠주고 사회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부모의 소득이 대학 입시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그 예가 된다. 미국 명문대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소득 최상위층에 해당한다. 계층을 물려주고 지위를 고착화하는 현상은 능력주의의 폐해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운과 우연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자만과 오만을 가지게 되고 실패한 자들은 자책과 굴욕을 갖게 된다고 샌델은 말한다. 환경, 운, 우연 등과 같이 우리가 통제 불가능한 것들이 인생에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는 오직 그 결과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내맡긴다.

한국 사회는 완벽한 능력주의를 지향하는 만큼 심각한 폐해를 가지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학력이 갖는 힘이 압도적이다. 명문대 출신들이 한국 사회 대부분의 부와 기회를 독점하고 있다. 명문대 졸업장은 사회진출 단계에서 봉급, 지위, 기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모두가 서울권 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인식 차원에서 그들의 사회적 인정과 명망은 추락하고 있다. 학벌에 대한 인식과 낙인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능력을 보상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기에 문제점이 발생한다. 한국의 능력주의 사회에서 학력이라는 시스템이 새롭게 기회를 얻으려는 이들에게 기회를 아예 박탈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력에 가로막혀 기회를 얻지 못한다. 기존의 지위와 계층을 확보한 사람들은 능력주의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공고히 하고 독점을 유지한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발전을 가로막는 작용을 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는 보수가 직업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직업의 가치가 곧 사람의 가치로 이어지고 소수의 인원들에게 부와 명예가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평범한 다수의 이들에 대한 가치가 쉽게 부정되고 있다. 학력에 대한 낙인으로 개인의 가치가 결정되고 평범한 대다수는 인정과 가치를 받지 못해 사회적 박탈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회문제는 불공평과 불평등에 관한 이슈가 주요 화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노동자 인권문제, 노사문제 등등은 자유 시장 경제가 심화되면서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경력이 많다고 승진과 보수를 보장하는 기성세대의 시스템은 흔들리고 있다. 누군가의 인맥, 빽, 부모의 재산으로 높은 지위를 보장하는 시스템은 무너지고 있다. 이제는 능력과 노력에 정당한 보상을 지급할 때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썩은 문화를 어서 빨리 뿌리 뽑는 것이 시대의 과제이다. 첫째는 군대 문화고 둘째는 유교 문화다. 짬 대우 받고 나이 대우 받는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결혼하면 여자만 집안일하고 애 키우는 시대는 이제 지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작은 것부터 바꾸어야 한다. 한국어를 보자. 한국어의 높임말에는 정도가 구분되는데, 반말이 있고 ‘~요’체와 ‘~습니다’체가 있다. 한 살 차이로도 선배와 후배 구분이 확실하다. 아이들에게도 형, 언니, 동생은 칼 같다. 어떤 선생은 자신에게 ‘습니다‘체를 학생들에게 요구하였는데 ’요’자는 너희들 형에게나 쓰는 말이므로 어른인 자신에게는 ‘습니다‘체를 쓰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선생에게 애들은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 어른들은 싸우다가 반말하면 왜 반말이냐고 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말한다. “너 몇 살이야! 나보다 나이도 어려보이는 게!” 우리 사회에는 나이 문화와 존댓말 문화는 사라져야한다. 존댓말이 윗세대와 아랫세대의 소통을 가로막고 이는 대화의 단절로 이어진다. 말부터 통일하자. 모두가 나이에 상관 말고 반말을 하든가 모두가 ’요’자를 쓰든가 말이다. 언어에서 위아래 구분이 사라지고 통합이 이루어지면 집단과 사회에서 더 활발한 담론이 펼쳐질 것이다. 의견을 개진하는 데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대화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우리는 세대 간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 서열과 예절이 대화의 물꼬를 흐린다.


사회적으로 다양한 갈등과 불만이 터져 나오는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대화와 토론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바뀌지 않고 있다. 학력, 나이, 존댓말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 학력이 기회를 빼앗고 나이와 존댓말이 소통을 단절시키고 있다. 관념이 물질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기술은 빠른 미래에 금방 우리들을 위협할 것이다. 관념이 변화한다면 이 시대에 물질은 따라올 것이다. 지금은 작은 변화마저 절실할 때이다. 우리는 이미 사소한 문제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바꾸지 않을 따름이다. 작은 것 마저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큰 것도 바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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