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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우리 삶의 목적은 행복인가?

삶의 의미

by 인드라망


인간이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생각은
작업반장이 휘두르는 몽둥이 한 대만 맞아도 사라지는 한심한 이데올로기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행복은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다.

행복은 인간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인생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행복하면 좋을 일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삶의 대부분을 불행으로 보낼 우리들은 삶의 목적을 행복으로 두어선 안 된다. 행복한 상태란 모호하고 붙잡아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쥐어진 행복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금방 날아가버린다. 우리는 불행에 대비하는 것이 낫다.




단순한 즐거움만이 행복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피시방에서 컵라면을 먹으면서 하루 종일 게임을 하는 건 장기적으로 볼 때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에 누워서 유튜브나 인스타를 보면서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진정한 행복이 아닐 것이다. 평생 그러고 살 순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진정한 기쁨을 느낀다. 전보다 나아진 자신을 원하고 자신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도스토옙스키는 유토피아라는 것이 실현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어려움을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쉬운 삶을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다. 게임에서 치트키를 써서 다 부수고 다니면 재미가 없듯이. 고난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서 성장하기를 인간은 원한다. 어려운 보스를 잡으면 진정한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살면서 걱정 없고 불안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걱정과 불안은 주 원동력이 된다. 우리 옛 조상은 미래에 닥칠 생존의 위협에 걱정하고 불안해한 덕분에 미리 대비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다 보면 대번에 그 문제점이 드러난다. 모든 사람이 정해진 시간에 같은 노동과 일을 고 생활패턴이 정해져 있다는 것.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과 같다.(혁신은 정해진 틀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인간을 평등하게 본다는 시각이 들어있다. 그러나 인간은 남들보다 뛰어나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기를 원하고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그렇지 않으면 명품을 두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주목받고 싶어 하고 권력을 원한다. 인간은 본래 정복자이자 탐험가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단순한 쾌락에서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게임, 마약, 술, 담배, 포르노를 즐기는 게 진짜 행복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이 단순한 쾌락에 젖어들 수 있는 환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일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늘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다. 시간이 나면 핸드폰으로 유튜브와 인스타를 챙겨본다. 그러면 금세 즐거움을 느낀다. 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약을 규칙적으로 주입하고 복용하는 것과 같다. 즐거움이란 이런 것인가?








삶의 의미는 모두가 제각각이다. 하지만 맡은 역할에 책임을 다하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은 또 없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는 죄책감과 불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거의 미친 사람이 돼서 행동한다. 그러나 전에 술집에서 만났던 밑바닥 인생의 사내가 마차에 치인 것을 발견하고 그를 치료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사내는 잠시 뒤에 죽고, 장례식을 치를 비용도 없는 그의 가정에 충분한 돈을 준 채 떠난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살하고 싶을 만큼 극단적인 상황에 치달았었다. 그러나 도움을 준 순간 활기가 나고 다시 살아갈 의지를 얻는다. 그의 도움이 스스로를 구원한 셈이었다.(얼마 안 가 다시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으로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리지만.)




올리버 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환자들은 살아갈 가망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가 가진 취미와 특기로 살아갈 의지를 이어간다. 이야기의 환자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보통 사람들과 멀었고 결손 있는 이들이었다. 성공과 정반대의 밑바닥 인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의미를 사소한 것에서 하나씩 찾아갔다.




어느 심리학자가 정신병원에서 근무했을 적에 겪었던 일화가 있다. 그가 돌보던 환자 중에 한 명이었는데 그녀는 아이큐가 낮아서 모국어도 제대로 쓸 줄 몰랐다. 걸어 다니면서도 늘 허리를 굽힌 채, 반은 겸손으로 반은 두려움으로 한 손으로 눈썹 위를 받치면서 다니곤 하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볼품없어서 당연히 성적 매력도 없고 가족이라곤 늙은 홀어머니 한 사람뿐이었다. 캐나다의 추운 지역에 있던 그 병원은 끔찍해서 거의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곳에 그녀는 치료를 위해 입원했다. 그녀는 강아지를 키웠는데 강아지와 산책을 하러 나갈 때면 늘 같이 산책 나갈 사람을 찾아다녔다. 자신보다 힘든 사람들을 챙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고 밑바닥 인생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기보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심리학자는 몇십 년이 지나서도 그 일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김영하 작가는 <작별인사>에서 인간 삶의 목적을 말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무한히 늘릴 수 있는 악한 존재다. 그러니 인간 삶의 목적이란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의미가 없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허무주의를 경계해야하기도 하다. 우리는 보람차고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불행을 겪어도 그것을 뛰어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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