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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정 Nov 06. 2024

말랑한 샤프가 갖고 싶었어

 

어린 시절 나는 언제나 문방구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알록달록한 필기구들이 가득한 그곳은 나에게 작은 세계의 전부 같았다. 

 볼펜, 연필, 지우개, 색연필… 그중에서도 나는 유독 고급스러운 샤프에 마음을 빼앗겼다. 나무나 플라스틱 대신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샤프를 손에 쥐면, 왠지 어른스러운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늘 꼭 필요한 물건만 사주셨기에, 그 샤프는 언제나 나의 작은 동경으로만 남았다.


 사실 샤프뿐만이 아니었다. 필기구라는 것 자체에 대한 애정과 탐닉이 나에게는 마치 첫사랑 같았다. 

어린 손으로는 필기구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손끝에 닿는 감촉을 느꼈고, 그렇게 나만의 세상 속에서 조용히 마음을 채워갔다. 

학교 앞에서 나눠주던 광고용 노트를 모아서 책상에 진열해 두고, 지점토를 사서 물에 끓여 지우개로 사용해보기도 하고, 친구들이 버린다던 몽당연필을 받아 캡을 끼워 또 다른 연필로 재탄생시키기도 하던 어린 날의 나.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 작은 필기구들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오래도록 나와 함께할지,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얼마나 깊이 연관될지 상상조차 못 했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나는 알바를 해서 돈을 벌었고, 초등학생 때는 그렇게나 비싸보였던  꿈 꾸던 샤프를 가뿐하게 손에 쥘 수 있었다. 

 무겁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나와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필기구는 단순한 소유의 기쁨에서 벗어나 내 삶의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특히 다이어리에 적어 내려가는 감정 일기는 나를 이해하는 수단이자, 내 안의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푸는 방식이 되었다. 나는 수없이 많은 감정이 뒤엉키는 사람이다. 작은 일에도 여러 가지 감정이 겹치고, 때로는 그런 내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이어리에 적어보며 천천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샤프 끝에서 펼쳐지는 글자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나를 위로하는 작은 손길이 되어 주었다.



직장에서도 다이어리는 여전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노트북을 기반으로 모든 업무가 진행되지만, 내 책상 위에는 머그컵에 가득 필기구가 꽉 차있다.

노트북 아래 선반에는 몇 가지 종류의 노트들이 숨어있다. 실수와 잘한 점을 기록한 업무 피드백 노트, 공부하면 좋을 업무 관련 인사이트를 정리한 노트.

 매일 적어나가는 업무 계획과 성찰의 기록 속에서 나는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종이와 글자 안에서 펼쳐지는 내용들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리해 주었다. 


 언젠가부터 나의 성장은 주변에서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상사와 동료들은 내게 칭찬을 건네기 시작했고, 나는 비로소 내가 꾸준히 쌓아온 작은 노력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필기구는 나에게 단지 글을 적는 도구가 아닌, 나를 발견하고 단단히 다져주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필기구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어릴 적에는 반짝이는 외관에만 이끌렸던 샤프가 이제는 그 너머의 나를 마주하게 하는 친구가 되어버렸다. 


문방구에서 반짝이는 샤프를 동경하던 어린 나는 지금도 여전히 손끝에 필기구를 쥐고 있다. 샤프 끝에서 시작된 글자들이 모여 나의 하루가 되고, 그 하루들이 쌓여 나를 이루고 있다.


언젠가 이 모든 기록이 나의 인생을 증명해 줄 날을 꿈꾸며, 나는 샤프 끝에서 내일의 나를 향한 이야기를 조용히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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