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도 눌러앉지도 못하고 평생 갈팡질팡
어째서 이렇게 아플까.
한 달에 며칠 정도, 고개도 못 가누도록 기력이 빠지고 두통에 구역질을 한다. 무슨 큰 병 같지만 병명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냥 체했다, 는 설명 정도. 평소에 많이 먹지도 못하고 남들 반밖에 못 먹는다. 아주 조금, 한 숟가락 더 먹었다 싶으면 옳다구나하고 또 두통과 구역질이 풀쩍풀쩍 일어난다. 한 달동안 안아프고 잘 버티면 대단히 잘 살았구나, 한다.
아프지 않은 구간 동안은 또 과하게 일하고 움직인다. 1분도 앉지 않고 불도저처럼 무언가를 한다. 그러니 딱히 병이라고 할 수가 없다.
사실 그렇다. 스님처럼 야채와 밥만, 1/3공기 정도 먹고 살면 아플 일이 없을거다. 잘 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난 속세에서 온갖 자극을 다 마주치며 살고 있지 않나, 하고 변명해본다.
잠들면 가끔 하늘의 세계에 간다.
믿지 못할 얘기지만 그렇다. 잠든 후의 이야기니까. 못할 것이 없다.
하늘이라고 해서 천국을 떠올린다면 그건 인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이다.
키 크고, 가느다랗게 날씬하고, 투명하게 잘생기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고, 빛이 있다.
그게 전부다. 나머지는 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다.
그게 전부라는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없다’는 얘기다. 지구에 존재하는 지저분한 삶의 분비물들이 없다. 먹고 자고 싸고, 이 3가지만 하지 않아도 삶은 아름다워진다. 화장실도, 쓰레기도, 음식을 생산하고 요리하고 버리고 파는 과정 모두가 없다. 우리가 먹고 자고 싸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부산물들이 존재하는가 생각한다면 끔찍한 일이다. 그곳에는 오로지 빛만 존재한다. 옷도 빛이고, 계단도 빛이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렇다.
그곳에서는 시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시간은인간이 창조해 낸 개념이다.
지구의 시간은 같은 중력이 미치는 영역에서 존재하는(또는 이름지은) 물리적인 개념이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그의 저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시간이란, 물질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 간의 동적인 구조에 나타나는 양상일 뿐이다’ 라고 설명한다. 물질이 중력장에 의해 영향을 받고, 물질들이 변화하는 원인과 결과를 인간들은 시간이라 이름붙였다. (책 한 권의 내용이 방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공간은 시간이 만들어낸 부산물이기 때문에 하늘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하지만 건물과 집은 있다. 그 또한 빛으로 이루어져있다. 빛으로 만들어졌다면 안이 다 들여다보일 것 같은데, 또 그렇지도 않다. 문을 열어야 안에 있는 사람이 보인다. 공간이 없는데 빛으로 구획을 나눈 곳에 사람이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내 얕은 물리학 지식으로는 더 이상 설명하기가 어렵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원하면 건물을 (말하자면 공간을) 에너지로 만들어낼 수는 있다는 정도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빛은 양자이고, 그곳에서는 양자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 될 지 모르겠다.
재미있는 것은 감정도 없다. 극단적인 평온함만이 존재한다. 감정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니던가.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동시에 좋아하고, 행복(이라 착각하는 순간적 호르몬의 분비상태)을 느끼는 것. 그래서 순간적 호르몬 분비를 기대하며 빼앗고, 죽이고, 온갖 만행의 원인이 되는 것. (그런데 막상 수백억을 가져도 24시간 행복 호르몬 분비가 계속 되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행복 호르몬 분비가 된다면 인간은 미치거나 죽거나, 둘중 하나가 될 것이다.)
처음에 감정이 없는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는 로봇인 줄 알았다. 뭐 저렇게 무감정하지, 사회성이 없나, 그냥 관심이 없는 건가, 들여다보다가 눈을 뜨곤 했다. 그런데 또 그들은 사람을 좋아한다. 서로 함께 있고 싶어 무진장 들이댄다. 긍정정서만 있다할까, 감정없이호르몬에 반응하는 자극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철없는 어린아이 같다. 걱정도 무서움도 없는.
그럼 뭐 천국이야?
하늘이라고 표현하니 죽어서 가는 곳 같은데, 죽었다고 가는 곳은 아니다. 엄연히 다른 세계다. 요즘은 죽어서 가는 사람도 있기도 하고,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 지구에 있으면서 가끔 갈 수도 있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죽어있기도 하고, 살아있기도 한 상태. 하나의 입자가 벽면의 여러 곳을 한 번에 통과하여 반대편으로 도달하는 양자역학과도 같은 상태. 평행이론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얘기다. 대부분의 지구인은 지구에서만 존재하며 그곳에는 갈 수 없다.
과학자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에 대해 '문제는 인간에게 있는데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고 동시에 두 개의 구멍을 지난다는 이 상황을 설명할 만한 언어가 없는 것이 또한 문제이다. 이런 개념과 경험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지 우주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설명할 재간이 없는 내게 이 상황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나조차도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으므로.
오랫동안 내가 보아왔던 것들을 가족 외의 사람들에게이야기 한 적 없었다. 이것을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인정하는 순간 내 삶이 휘둘릴 것을 걱정했으므로. 더 나은 삶이 있다는 것을 보고서도 죽지않고 버티기가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지 모른다. 죽는 것이 곧 해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버틸 뿐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죽어있기도 하고 살아있기도 하며 이 쪽 저 쪽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여기서 버티지 않는 일이 또한 저 쪽에 어떤 영향을 줄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알면 알수록 두렵고, 그래서 더 현실에 몸을 내던지며 산다. 구질구질하지만 열심히 밥을 씹어먹고, 아이 똥을 닦아주고, 택배를 싸고 돈을 번다.
구질구질하지만 버텨야하니까
이 삶은 무한히 그어진 긴 선의 한 점 정도다. 잘나봐야 점에 불과하다. 그래도 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 (더 나은 점인지) 고민해야 한다. 구질구질하다고 가족도 다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홀로 도 닦던 성철스님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시에 찾게 되었다.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좀 안다고 주어진 고생을 내동댕이치면 아무것도 없는세계로 들어가고야 만다. 물질도 빛도 없는 곳으로. 그리고 수천년 후에, 무한히 긴 선의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500억 판까지 깬 게임에서 죽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삶에 감사하라 한다. 아슬아슬하게 죽을 고생하며 여기까지 온 게 어디냐 하므로. 다시 첫 판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감사해야 한다고.
먼지 한 톨에 불과한 존재를 의미있는 존재로 만드는 중이니 감사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생각 따위 하지말고
무엇이 옳은 방향인가는 생각할 수록 모르겠다. 몹시도 정치적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이래도 잘못하고 저래도 잘못한다. 한평생 유리조각 위에서 발 끝으로 동동거리며 눈치보다 끝날 참이다.
돌 된 둘째에게 새로 옷을 다 입혀 놨더니 현관에 나가 바닥에 맨발로 철퍼덕 앉았다. 온 옷이 모래와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꽥꽥거렸더니 ‘으앙’하면서 겁먹은 눈으로 ‘내가 뭘 잘못했어?’하고 묻는다. 내가 하는 짓 같다. 대체 뭘 잘못하는지, 왜 혼나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혼이 난다.
하도 혼이 나서 무서우니까 우리끼리 끌어안고 있자 했다가 또 혼쭐이 났다. 그 인연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생하기 위한 숙제 덩어리일 뿐이라고. 그래도 여기에서 의지할 곳은 찰나로나마 존재하는 서로의 살결 뿐인데.
그러니까 잠이나 자야겠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미친듯이 공부하다가 몸을 돌아보니 엉망이 되었다. 또 혼이 나겠지. 그러니까 잠이나 자야겠다. 가끔 가는 그곳을 한 번이라도 더 구경할 수 있으려나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