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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Mar 14. 2018

기다리는 이 하나 없는 그곳에 진하게 스며들기도 하면서

홀로 여행 130일


-홀로 여행 130일-

기다리는 이 하나 없는 그곳에 진하게 스며들기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가 어딘가요?”


여행 중 길에서 만났던 수많은 인연들과 그들에게 받았던 한결같은 물음들

만나는 사람마다 처음 받았던 질문처럼 고민 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그곳이 모로코였기 때문일 거야. 그날을 떠올리라면 밤새도록 수다를 떨어도 모자라는 날이지.

향이 진한 차 한 잔과 내 이야기를 나보다 더 행복하게 들어줄 당신만 있다면.


     



모로코 메르주가 사하라사막



"당신이 꿈꾸던 여행은 어떤 여행인가요?"


잔잔한 첼로 멜로디와 에스프레소 향을 즐기는 파리지앵보다 터번을 두르고 낙타에 올라타 황량한 사막을 거닐던 여행자를 꿈꿔왔다. 마치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 속 쓸쓸한 유랑자처럼.

어쩌면 그 유치한 이유 하나가 130일 여행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야, 시베리아 횡단 열차 타고 유럽 갔다가 모로코까지 찍으면 대박”



친구에게 그 말을 던지고 한 달 뒤에, 어학연수 가려고 모은 돈을 몽땅 들고 유럽으로 날아갔다. 내 인생 첫 번째 버킷리스트,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예매하고 편도 비행기 티켓만 끊은 채로 떠나는 여행 말이다!

그렇게 24살 시작과 함께 무계획으로 떠난 여행의 끝자락에 어느덧 러시아, 아이슬란드,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모로코,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독일, 폴란드 16개국을 다녀오니 24.7살이 되어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하고 가고 싶은 곳은 가야 하는 성격 때문에 25년째 엄마 잔소리와 함께 살지만, 어쩌면 내가 만드는 행복한 방황 인지도 모르겠다.      






19살, 앞치마만 둘러매면 뭐든 해내시는 엄마를 보고 하루빨리 어른이 되길 바랐던 그날도 어느덧 6년 전 이야기가 돼버렸다. 시간이란 녀석은 성격이 급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때론 차가울 만큼 쌀쌀맞기도 해서 기회조차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두 번 다시없을 스물넷에 긴 여행을 결심하였고, 동시에 대단한 무언가를 얻으려는 욕심부터 버렸다. 어쩌면 내가 몰랐던 세상에 조금 발을 디디는 그 정도일 것이다.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나에게 주어진 130일의 기회가 더 설레었기 때문에.


부디, 후회 없는 청춘을 보내길 바라며. 당신의 여행에도 안녕을.

   



새벽 4시, 몇 주 전부터 꾸린 배낭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먹을 일주일치 식량을 챙겨 집을 나섰다. 당분간 못 보게 될 딸을 위해 어릴 적 소풍날 마냥 김밥 준비 중인 엄마와 배낭 한 번 더 살펴주시는 아빠. 공항까지 바래다주지 못한 게 내심 마음이 쓰였는지 “놀러 간다는데  배웅은 안 해도 되지 뭐, 맞나!” 경상도답게 무뚝뚝하게 던진 말이지만 말하지 않은 미안함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엄마의 부스스한 머리칼과 아빠의 늘어진 옷자락 그리고 슬리퍼 차림으로 손 흔들어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금방 올꺼제?”

 

그땐 내 못난 욕심 때문에 엄마의 마음을 미처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아이슬란드,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즉흥적으로 루트를 잡았다. 꿈에 그리던 에펠탑에서 화이트 와인도 마시고 열흘 계획이었던 런던이 너무 좋아 3주를 눌러앉기도 했다. 포르투갈 야경을 보며 분위기에 취하기도 하고 스페인 빠에야를 맛보고 샹그리아를 들며 “cheers!"를 외쳤다. 그러나 사실 매일같이 행복한 건 아니었다. 돼지고기 듬뿍 넣은 엄마표 김치찌개가 너무 먹고 싶어 집에 돌아가고 싶었고, 그렇게 갈망하던 유럽의 거리들이 어느덧 나의 평범한 일상이 돼버렸다. 순간 지겨워졌다. 말도 안 돼. 여행이 지겨워지다니. 평범한 것들이 그리워지고 갈망하던 것들이 지겨워졌다. 무엇이 이토록 잔잔한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일까. 그리고 가지고 온 지도를 펼쳤다.


"그래, 다음은 모로코야." 

     

여행 중이었지만 나를 더 여행 속으로 데려갈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가방 끈을 조여 맸다.

그때의 모로코는 내가 다시 일어서기에 충분했다.

       



사하라를 가던 중 첫번째로 만난 로컬쉼터




스페인 남부 세비야에서 아프리카 사하라로 가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 한다.


타리파-탕헤르-마라케시-메르주가


시작도 전에 한숨부터 나오는 기나긴 여정.

여행을 하다 보면 때때로 연인과 일주일 동안 지독한 말다툼을 하는 것 같은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이 꽤나 찾아온다. 우선 페리를 타고 국경을 넘기 위해 타리파 선착장에 가야 했다. 정열의 플라멩고처럼 뜨거웠던 세비야의 일주일을 뒤로한 채.

버스 1시간 반을 달려 선착장에 도착했다. 2시간 배 멀미를 해가며 우여곡절 끝에 탕헤르에 도착했더니, 세상에 마라케시행 열차가 8시간 뒤에 있다는 것이다. 꼼짝없이 노숙이다. 난생처음 아프리카 땅을 밟자마자 기차역 노숙이라니. 첫 만남치고 격한 환영이다. 지금 이 순간 침 자국 가득한 내이불과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안 카드나!" 엄마의 따가운 잔소리가 조금 그립다. 그렇지만 괜찮다. 이제는 여행 동반자가 돼버린 45L 배낭과 엉덩이만 붙일 수 있는 공간만 있다면 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기나긴 8시간 대기 후 겨우 올라탄 열차는 좌석이 불편해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12시간 만에 마라케시에 도착했다.

 


난생처음 마주했던 아프리카 아잇 벤하두

     



뜨겁다.

24시간 이동으로 지칠 때로 지쳐버린 나를 반기는 달갑지 않던 40도의 날씨. 한숨도 잠시,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미니밴을 타고 1박 2일을 달려야 한다. 각국에서 사하라를 보기 위해 모여든 배낭여행자들과 덜컹거리는 미니밴에 몸을 싣는다.

그들이 사하라를 찾은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분명 우리는 긴 기다림 끝에 주는 달콤함을 믿는다. 물론 그 순간이 미울 만큼 짧게 느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달리면서 ‘글래디에이터’ ‘왕좌의 게임’ 촬영지였던 아잇 벤하두에 들리기도 하고, 아틀라스 산맥의 허리를 달려 바람을 맞기도 했다. 창문 너머 보이는 절벽에 넋을 잃다가도 기사 아저씨 18번 노래 무한반복으로 귀가 따갑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밤이 돼버렸고, 우리는 여기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거리에 집이라곤 오늘 밤 머무르게 될 숙소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룻밤 눈만 붙이고 우리는 다시 사하라를 향해 달려야 한다. 



사하라에서 맞이한 아침은 아름답기보단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다음날 해가 밝았고 드디어 여정의 마지막 날이 올랐다.

드문드문 보이는 판자촌을 지나니 어느새 창밖의 풍경은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뿐이었다. 이 기사양반은 동서남북 같은 풍경을 참 잘도 달린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아프리카구나. 내가 진짜 아프리카에 오기는 왔구나.

그렇게 반나절을 달렸을까, 창밖으로 보이는 낙타 두 녀석이 사하라가 눈앞이라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덜컹- 반가운 소리와 함께 미니밴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여행한 지 50일째 되는 날 그곳에 도착했다.





사하라

그곳은 나를 다시 여행의 시작점으로 데려다준 곳이었다.




낙타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오늘 밤을 보내게 될 베이스캠프에 다다른다. 40도가 넘는 더위와 사방으로 부는 모래바람과의 싸움. 끈적끈적한 몸 사이 달라붙는 잔모래와 배낭을 메고 낙타를 타느라 뭉친 어깨가 지독하게 괴롭힌다. 설령 그러면 어때, 사하라에 왔잖아.

두 눈으로 사하라를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몸으로 사하라의 모든 걸 담아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서 맨발로 모래언덕을 더 꾹꾹 밟으며 걸었다. 정말이지, 하얀 도화지에 하늘색과 갈색 딱 두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는 사하라의 풍경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단순하지만 어쩌면 완벽한 그림 속에 들어온걸까. 130일 여행의 절반 앞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엇을 얻으려 시작한 여행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내려놓을 수 있었던 모로코. 그런 마음 때문일까, 나는 그때부터 모로코를 사랑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2017.05.14 오후 6시



2017.05.14. 오후 6시 일기

사하라 사막에도 노을이 졌어요.

그날은 유독 붉게 물들었다고 표현할래요.

오늘 본 노을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다고,

조금은 이기적인 욕심도 품어볼래요.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두 눈을 감았다. 눈을 떴는데 감사하게도 여전히 사막이었다.

오늘 밤 자야 하는 베이스캠프와 그 앞 작은 나무 테이블과 의자. 프랑스 부부, 홍콩 여자아이들, 스페인 남자, 그리고 24살의 나. 테이블에 모여 앉아 현지인들이 만들어준 콩 볶음밥과 닭요리를 먹었다. 우리는 이 달콤한 순간을 예상했듯 서로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고 오늘 처음 본 이들에게 고마움까지 느낀다.

사하라는 이 분위기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진한 색의 크레파스를 꺼냈다. 그러곤 20 가지 색 중 제일 짙은 검은색으로 하늘에 어둠을 칠했다. 금방이라도 곯아떨어질 것 같았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막에 누워 바라본 수 천 개의 별과 봉우리 너머로 쏟아지는 별똥별로 그 이유는 충분했다.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하늘 아래 누워있다고.

     





그랬다.

여행의 절반쯤 왔을 때 나는 사하라의 밤처럼 더 짙어져 있었다.

나는 지난날 내 일상의 나태함을 채찍질하기도 했지만 그런 나태함이 여행에서는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긴 여행을 하면서 혼자라는 이유로 두렵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새로운 곳을 갈 때마다 그 나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아 나는 더욱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처음 마주하는 낯선 땅. 기다리는 이 하나 없는 그곳에 진하게 스며들기도 하면서 내일 해가 뜨면 또다시 오늘을 그리워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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