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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May 16. 2021

빠알간지붕, 파아란 하늘

300원과 700원, 그 언저리에서 한껏 얄팍해진 마음

평일 아침 7시 40분. 부랴부랴 출근 준비를 마친 후, 신발장 앞에서 운동화에 발을 꾸겨 넣는다. 바삐 움직이는 발을 따라 오른손도 분주하다. 급히 입은 탓에 안으로 접힌 재킷의 깃을 빠르게 정돈하고 밖으로 나오니 41분. 정확히 19분 뒤 도착하는 지하철을 타지 않으면 9시 전에 수원역 도착은 어렵다. 그럼 퇴근이 늦어지니, 지금 뛰는 게 낫다. 뛰자, 오늘도 열차를 잡으러 가야 한다.      



7시 59분. 허억-허억. 멀리서 들어오는 열차를 바라보며 밭은 숨을 내쉰다. 됐어! 성공했어! 오구오구, 오늘도 기특한 나 자신. 열차의 문이 열리기 전, 핸드폰의 잠금 화면을 풀어 스타벅스 앱에 들어간다. 도착역인 수원역에서 내리면, 8번 출구까지 제법 긴 통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그때 사이렌 오더로 음료를 주문하는 것이 오늘의 첫 일과다. 물론 매일 하는 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2번 정도? 일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귀한 이틀 중 하루로, 구매 전 잔액을 확인해야 한다.      



어디 보자, 잔액이 얼마나 남았나. 애걔, 겨우 1,100원? 제일 저렴한 아메리카노 커피를 사 먹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바로 잔액 충전 코너로 넘어간다. 충전 금액 이란 단어 밑으로 [1만 원]부터 [10만 원], 그리고 최대 55만 원까지 입력 가능한 [다른 금액] 버튼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서 맞닥뜨린 선택의 갈림길. 내게 허용된 오직 두 버튼인 1만 원과 3만 원 사이에서 깊은 고뇌에 빠진다. 만약 지금 3만 원을 넣으면 당분간은 편할 것이다. 하지만 왠지 모를 넉넉함에 취해 자주 사 먹게 된다면? 그건 위험해. 지출이 커질 우려가 있으니 불편하더라도 1만 원을 넣자. 잔액의 숫자가 11,000원으로 바뀐 것을 확인한 후, 열차에 탑승한다.      



우르르 들어가는 탑승객을 비집고 들어가 빈 좌석을 차지한다. 비슷한 속도로 옆자리에 앉은 한 여자. 착석의 타이밍이 비슷해 앉는 순간 서로의 엉덩이가 살짝 부딪혔다. 아! 하는 순간,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그의 표정은 덤덤하다. 오히려 부딪힌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올곧게 고정된 몸. 움직이는 부위라고는 손에 쥔 핸드폰 화면을 바삐 누르는 오른쪽 엄지손가락뿐이었다. 슬쩍 곁눈질해도 파악할 수 있는 고민의 두 눈동자. 그는 지금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 걸까?      



상체를 곧추세워 등받이에 붙인 후 눈높이를 키운다. 그리고 높아진 시선의 끝으로 상대의 핸드폰 화면을 포착한다. 뭐지? 퍼센티지와 숫자가 빼곡한 저 표는. 거침없이 덧셈 버튼을 몇 번 누르고 나니 최종 버튼이 지키고 서 있다. ‘매수’. 그는 순식간에 주식을 매수했다. 뒤이어 두 차례 매수가 더 진행된 후, 화면을 새로 고침 하니 해석할 수 없는 빨강 파랑의 그래프가 0.1초에 한 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그래프의 움직임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여 이번엔 그의 옆모습을 똑바로 응시한다. 나와 같은 자리에 앉은 그는, 지금 돈을 번 것일까? 자산은 얼마나 될까. 앳돼 보이는데, 나보다 많을까?       



위험보단 안정을 선택해 온 인생. 정직하게 일한 만큼 돈 버는 것에 익숙한 일개미는 동학 개미가 될 수 없다 싶어 이내 고개를 돌린다. 암 그렇고 말고. 돈 다 잃으면 어쩌려고, 적은 돈이라고 해도 세상에 잃어도 되는 돈은 없댔어. 그리곤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열어 책을 꺼낸다. 요즘 재밌게 몰입해서 보는 책이라 그런지 책 곳곳에 형관 펜이 죽죽 그어져 있다. 자, 정신을 가다듬자. 나는 주식할 시간에 지식을 키운다, 우아하게.       


-1 ETH이 40만 원이 넘어가면서, 나는 언니를 장군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0억 가즈아!      


‘아니 아니, 그래서 다혜(주인공)는 은상 언니랑 진짜 돈 딴 거 맞아?’      

마음 정리를 위해 펼친 책은 다름 아닌 장류진 작가의 신작 소설 <달까지 가자>. 마론 제과에 다니는 주인공이 직장 동료와 함께 이더리움이란 비트코인을 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월급만으론 부족해! 어제보다 오늘이 1%, 아니 J곡선을 타고 우주 끝까지 상승하길 꿈꾸는 이삼십 대 직장인들을 위한 그야말로 하이퍼 리얼리즘 소설이다.      



<타이탄의 도구들>, <오늘을 사는 잠언> 등 10권도 넘는 책이 위시 리스트에 저장되어 있었는데, 왜 하필 이 책을 먼저 샀을까. 아니야, 장류진 작가님을 너무 좋아해서 그래. 다른 이유는 없고.. 이번 책도 잘 나간다길래.. 그냥.. 무슨 얘기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니 실은, 나는, 그러니까, 나도,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정말 많이. 적게 일하지 않아도 되니, 그저 많은 액수의 돈을 통장에서 만나봤으면 좋겠다. 마이너스가 아닌 인생, 과연 언제부터 내 인생에 장밋빛이 드리울까?      



귀여운 월급 외 들어올 생각이 없는 돈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져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문 밖에 즐비한 아파트 단지. 높낮이가 다양한 아파트 옥상의 빠알간 지붕들이 줄을 지어 넘실거린다. 그 위로 파아란 하늘이 아래 세상을 전부 뒤덮는다. 나를 태운 지하철까지 구석구석, 전부. 새빨간 지붕의 아파트는 곧장 끊겨버렸지만, 파란 하늘은 도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도 않고 따라왔다. 나의 시작점부터 가고자 하는 도달점까지. 정말 끊임없이. 파란색은 꾸준히 나의 세상에 있다.      



수원역에서 내려 출구로 걸어가는 동안 스타벅스 앱을 다시 켠다. 갑작스레 밀려든 허탈감을 떨치기 위해 오늘은 달달한 음료가 필요했다. 메뉴를 쓰윽 훑어 당도가 높은 음료를 선정한다. 돌체 라떼 5,600원, 돌체 콜드 브루 5,900원, 말차 프라푸치노 6,300원. 콜드 브루는 어째서 300원이 더 비싸고, 프라푸치노와는 700원이나 차이 날까? 다음번에 자몽 허니 블랙 티까지 마시려면 최소 5,400원은 남아있어야 하니, 오늘은 돌체 라떼 마셔야지. 결국, 오늘의 위시리스트에서 가장 밑단에 있던, 조금 덜 좋아하는 음료를 주문한다. 다음엔 내가 좋아하는 걸 꼭 주문한다! 진짜 다음번에는. 언제일지 모를 날의 기분 전환을 생각해 오늘 꾸욱 참는다.      



300원과 700원, 그 언저리에서 한껏 얄팍해진 마음으로 커피를 구매한 뒤 사무실로 향한다. 어쩐지 치사해진 하루의 시작. 인생 바깥의 것, 그래서 실망할 필요조차 없는 무언가로부터 받은 박탈함과 약간의 절망이 마음을 짓누른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는 비록 앙증맞은 크기지만, 일단은 이번 달 월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 작은 안도감으로 당장의 불안은 덜어진다. 월급일이 돌아오면, 오늘의 치사함과 이번 달 노고를 다독여줄 최애 커피를 꼭 사줄테다. 가격표 보지 않는 FLEX! 사이즈는 무조건 벤티로!   



영글 숫자엔 약하지만 글자엔 강해지고 싶습니다, 매일 조금씩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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