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글 Jul 28. 2021

잔인한 6월, 새로운 8월

2021년의 여름을 기록하며


6월부터 7월까지, 두 달이 1년처럼 지나갔다. 그동안 내게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을 메모장에 기록하니 글자로 빼곡해진 종이가 물먹은 것처럼 무겁다.      


6월은 잔인했다. 갑작스레 시작된 병 때문에 병원 신세까지 지고 말았다. 청명한 계절의 시작인 초여름, 나는 푸르른 하늘 대신 온통 하얀 벽지로 둘러싸인 병실 천장과 마주했다. 올 초부터 찐하게 달려왔던 회사 생활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며, 면역력이 많이 떨어졌다. 약해진 몸과 지친 마음에 불운까지 찾아와 결국은 입원행. 매일 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렇게 쉴 줄은 정말 몰랐다. 불편한 마음을 껴안고 침대에 눕자니 두통이 가시질 않는다. 눈을 감으면 업무 A, 외주 업체 B, 연락드려야 할 소비자 C, D, E가 눈에 아른거렸다.      


총인원 수 3명인 작디작은 스타트업에 누군가의 부재는 회사에 막심한 피해를 준다. 나 때문에 발생한 회사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몸집을 키운 문제 덩어리는 회사의 활력까지 잡아먹었다. 매일 연락 오는 대표님의 전화를 받기 전, 썰물처럼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에 맞서야 했다. 어떤 목소리와 마음 상태로 전화를 받아야 할까, 대표님의 오늘은 어떠실까, 혹 회사에 더 큰일이 일어나진 않았을까. 울리는 전화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애가 탔다. 그렇게 매일, 대표님과 통화하며 나는 반성과 자책, 억울함과 속상한 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 대한 걱정이 늘어나는 만큼이나 줄어들지 않는 또 하나가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나에게서 시작된, 나에 대한, 또 나를 위한 문제였다.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는가. 현 회사의 비전 1순위는 일에 대한 재미였다. 물론 기획하고, 실행하고, 성공과 실패로 냉정하게 결과를 얻는 일의 구석구석이 어려움 투성이지만, 그 과정을 즐기는 건 맡은 자의 몫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철저하게 실패하는 중이었다. 실패의 핵심은 스타트업과 마케팅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 무에서 시작된 회사에 시스템을 창조하고, 한 부서를 총괄하는 일은 지금의 경력에선 무리였다. 


체계는 물론이고, 회사의 브랜딩부터 제품 프로모션을 위한 채널별 콘텐츠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직원. 기본적으로 제품 시장과 타깃에 대한 조사, 경쟁사와의 가격경쟁력, 자사 제품의 USP를 분석할 눈과 각종 데이터를 기반으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디자인까지 가능한 기술을 갖춘 자가 지금의 회사에 필요한 인재였다. 이 모든 일에 경험이 부족했던 나에겐 업무를 마음대로 기획하고 진행할 수 있는 자율권보다 나를 이끌어줄 사수와 최소한의 업무 가이드라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케팅이란 게 어디 콘텐츠에만 국한되어 있는가. 소비자를 군집하는 바이럴부터 정량적 데이터를 해석하는 퍼포먼스까지. 업무 세팅부터 교육, 실무까지 전부 내 몫인 환경에서 일의 재미는 점점 불안과 자책으로 변해갔다. 매일 오르지 않는 판매 지수를 바라보는 일은 곧 나의 역량 부족을 자각하는 일처럼 여겨졌다. 타깃 선정을 잘못해서 그랬나, 콘텐츠 스토리가 별로였나, 콘텐츠 디자인이 못났나. 업무의 답답함을 터놓을 상대 없이 마케팅을 혼자 책임지다보니 하나둘 쌓이는 죄책감은 결국 ‘내가 못해서’라는 벽에 부딪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더욱이 개발자만 존재하는 회사에 마케터 한 명이 자유롭게 설 수 있기란 쉽지 않다. 제품을 만든 이들의 마음과 소비자의 냉정함을 절충시키는 과정엔 외로움이 증폭된다. 소비자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개발자의 노고를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 더 나은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시작된 소통도 끝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고 만다. 매일 회사의 존폐를 논하는 스타트업에 마음의 여유랄게 있었을까. 각자의 파티션 뒤로 경주마처럼 일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야는 오직 앞밖에 없었다. 잠깐의 멈춤도, 옆을 들여다볼 쉼도 없이 일한 탓에 서로를 헤아리지 못했다. 그렇게 모두에겐 서로에 대한 미안과 서로로부터의 상처만 쌓였다.      


사수의 부재, 마케팅에 대한 이해 부족, 내부 소통에서의 불편함과 외로움은 아픔 덕분에 끊어낼 수 있었다. 몸보다도 더 일찍, 더 오랫동안 아팠던 마음을 발견한 후로, 나는 내게 좀 더 맞는 일과 회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부서를 총괄하기보다 역량 성장과 실무 이행을 모두 실현할 수 있는 곳, 마케팅 전반을 다스리기에 앞서 강점이 발현될 수 있는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곳. 무엇보다 마케팅 업무에 관해 의논할 사람이 있는 곳. 나는 7월을 마지막으로 지금의 회사와 이별을 해 8월부터 새로운 곳에 출근하게 되었다.      


언젠가 한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너는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누리지 못하고 있어.” 20대를 점령했던 고시 생활과 실패는 나를 지금까지 잡아먹고 있다고 했다. 당시엔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나를 무시한 것과 같다. 나는 더 이상 과거와 싸우고 있지 않다. 현재를 만족하고 있진 않으나, 그 불만족이 나를 꾸준히 도전하게 한다.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로 나태해져 살지 않도록,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현재를 오롯이 집중하게 한다. 


29살 4년간의 임용고시 생활의 종료에서 시작해 3년이 지난 지금까지 4곳의 회사에서 일의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이제 5번째 기회가 손안에 쥐어졌다. 어쩌면 삶에 남아있는 거라곤 4번의 시험 낙방과 5번을 움직여야 했던 회사 생활의 아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위해 시도했던 수많은 도전은 나를 포기하지 않은 값진 경험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해 다시 한번 현재에 집중하려 한다. 늘 그랬듯 나로서 최선을 다해 살다가 더 나은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도전할 것이다. 어디서든 힘듦은 있고, 피할 순 없으니 또 부딪히며 열심히 살아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여간 옛날 사람이야 우리 신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