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빠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여린 사람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아빠를 닮았다. 쉽게 마음이 약해지는 아빠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는 셈이다. 대신, 섬세한 감정 탐지기를 갖춘 덕분에 아빠의 마음을 더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다.
퇴직 후 7년 가까이 사회에서 떨어져 지낸 아빠가 얼마나 위축돼있을지, 내 일처럼 쉽게 읽어낸다. 그럴 때면 나는 아빠에게 자주 말을 건넨다. 요새는 무엇이 재밌는지, 엄마와는 어떤 얘기를 나누는지, 손주들과는 어떤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특히 표정이 어두운 날이면 질문을 던지며 의식적으로 감정을 터트린다. 아빠의 하루는 언제나 가족으로 가득할 테니, 화가 났다면 추측할 것도 없이 범인은 가족 중에 있다. 그럼 누가 아빠를 속상하게 했는지, 무엇이 아빠를 괴롭혔는지 묻고, 아빠 대신 화를 내준다. 먹히는 진 잘 모르겠지만, 이게 여린 아빠를 챙기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말수가 적은 아빠가 적극적으로 대화하기 좋은 소재를 찾는다. 이를테면 언니와 내가 어렸던 십수년 전, 철없이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 같은 것들. 얼마 전, 오랜만에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던 날 아빠의 차 안에서도 그랬다. 고단한 여행길, 졸음을 달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유튜브로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고른 박창근의 리메이크곡 '다시 사랑한다면'이 끝나갈 즈음, 김동현과 이솔로몬이 부른 '사랑이란 건'이 다음 곡으로 배정되었다. 이건 내가 고른 곡이다.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기승전결이 완벽한 멜로디 때문이다. 특히, 절정 부분에서 솔로몬의 굵은 보이스와 얇고 쨍쨍한 김동현의 목소리가 결합돼 터져 나오는 부분은 언제 들어도 감탄이다. 자주 들어서 어느 부분에서 터질지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들을 때면 속절없이 눈물이 터지고 만다.
전주가 나올 때부터 코 끝으로 시큰함이 와르르 몰려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한참 말이 없던 아빠가 먼저 물었다.
"영아, 저 터널 기억나니?"
입을 떡 벌린 채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긴 터널. 우리 가족에겐 터널에 얽힌 재미난 추억이 있다. 나의 십대 시절, 연에 한 번씩은 강원도 여행을 갔던 우리 가족은 태백산맥의 곳곳을 뚫어 만든 터널을 지나갈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아빠는 언니와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저 긴 터널을 숨 참고 통과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내 인생에서 만난 인물 중 제일 똑똑한 아빠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고로 저 말은 검증 없이 믿어도 될 신앙이자 진리였다. 한껏 음이 올라간 말끝과 흥분에 찬 목소리, 핸들을 힘껏 잡은 탓에 봉긋 솟은 어깨. 룸미러 안으로 슬쩍슬쩍 비치는 웃음기 가득한 아빠의 얼굴을 어째서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두 눈을 꼭 감고 양손을 꼭 쥔채 주저리주저리 소원을 읊던 두 자녀의 모습, 숨을 참느라 시뻘게진 두 얼굴을 훔쳐보며 낄낄-하고 웃었을 아빠를 생각하면, 억울함이 불쑥 튀어오른다. 이런 젠장!
헌데 정작 콧 속은 더 매워졌다. 참는 한계에 다다른 물기가 코에서 역류해 두 눈에 차오르니, 얼른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터널을 보고 아이처럼 신이 난 아빠를 보니 먹먹함이 밀려왔다. 자신의 힘으로 지켜온 가족을 데리고 여행지로 갔을 한 가장의 모습. 차 트렁크에는 캠핑용 텐트와 해먹이, 좌석에는 사랑하는 두 자녀와 아내가, 그리고 새벽부터 바리바리 싼 도시락과 간식을 의자 사이사이에 채우고 열심히 달렸을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는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 아무런 걱정 없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야."
아빠의 마음 깊은 곳에 고이 접어뒀던 빛바랜 행복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탕탕탕- 소금강 앞에서 힘껏 못질하며 만들던 4인용 텐트처럼 아빠의 추억이 부풀어 올랐다.
"큭큭큭큭 맞아 아빠, 기억난다! 나 그때 얼마나 열심히 소원을 빌었나 몰라. 그 어린 나이에 갖고 싶은 게 뭐가 그리 많았는지. 그때 정말 좋았다 아빠."
'사랑이란, 사랑이란 이유로 눈물이 나는 거고, 홀로 걷게 되는 거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란 슬픈 얘기 후에 사랑이 찾아오고.'
노래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고, 차는 터널 속으로 진입했다. 바깥세상으로부터 단절되는 찰나의 순간. 아빠와 나는 빨려가듯 과거에 들어갔다. 우리 생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찬란한 행복 속으로. 그렇게 1분 10초, 산소없이 견딜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이 지나자, 차 안으로 강렬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유치 찬란한 거짓말에서 얼른 깨어나라는 듯이.
'사랑이란 사랑이란 이유로 만나서 헤어지고 그리워 기다려지고. 지쳐가던 알 수 없는 날에, 다른 사랑이 찾아오고.'
노래는 끝이 났고, 곧이어 다음 노래가 시작되었다. 우타고코 로리에가 부른 '어릿광대의 소네트.' 2024년의 아빠가 가장 많이 찾아 듣는 노래에 맞춰, 그와 그를 닮은 딸이 현실로 돌아왔다. 같은 마음 같은 모습으로. 흥분하면 커지는 목소리,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벌린 입, 촉촉해진 눈가를 닦는 오른손의 위치까지 동일하게. 뒷자석에서 엄마가 잠시 잠든 사이, 아빠와 나 단둘이 다녀온 깜짝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