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 앞에 놓인 분단선의 정체

HFK 써보는 경험 과제

by 영글

“*주댕아, 언니 이제 출발한다. 주차장으로 나와.”

*글쓴이의 별명이자 친언니만 부르는 애칭.


일요일 오전 여덟 시 이십 분. 주말 아침부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일무이한 언니.’ 친언니의 카톡이었다. 이른 연락이었지만 놀라진 않았다. 대신 미리 꺼내 둔 패딩을 걸치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그녀가 연락할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만난 건 드라이브가 필요해서였다. 목적지는 파주 임진각 끝자락, 민통선과 맞닿은 곳에 숨은 카페 ‘포비 DMZ.’ 실향민들의 민속주점에서 2019년, 현대식 카페로 재탄생한 곳이다. 그래서일까. 그곳에서 북한을 마주할 때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경이와 선 하나에 가로막힌 씁쓸함이 마음에 내려앉곤 했다.


서울에 사는 내가 북녘에 바짝 닿은 파주까지 간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에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파주 운정동에 모여 산다. 부모님 댁에서 언니네까지는 성인 걸음으로 약 10분 남짓. 그래서 누구를 보러 가든 결국 두 집을 모두 들르는 건, 자연스레 안착한 우리 가족의 암묵적 약속이다.


이번에도 본가에 간 김에 언니를 본 것이지만,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한마디에 언니 집엔 곧 비상등이 켜졌다. 두 아이 엄마의 출가는 곧 긴급 상황이니까. 그 고된 여정을 앞두고 형부가 흔쾌히 허락한 건, 육아 사정을 잘 아는 내가 이런 부탁을 쉽게 꺼내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딱히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몇 달간 쌓인 회사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서울을 벗어나 본가까지 왔지만, 부모님 앞에선 마음껏 괴로워할 수는 없을 터.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회사 얘기를 척척 알아듣는 사람, 운전도 잘하며 내게 디저트까지 사줄 수 있는 사람. 이번에도 언니가 유일무이했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쯤 늦게, 주황색 셀토스가 주차장에 들어섰다. ‘쟨 도대체 언제 안 늦을까.’ 지각쟁이 꼬리표를 달고 사는 그녀는 타인의 시간을 제멋대로 쓰는 데 익숙하다. 문제는 그 버릇이 늘 가족들의 체념으로 덮여왔다는 것.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짜증이 나는 내가 지겨웠다. 30년 넘게 뒷박만 타는 그녀의 느긋함에 무뎌질 법도 한데. 이 짧은 드라이브에 들떠 여덟 시부터 준비한 내가 더 싫었다. 또 나만 진심이었던 것 같아서.


차문을 열자 미소 띤 언니가 인사를 건넸다. 나는 말없이 차에 올라타 창문부터 내렸다. 그녀의 다정한 온기보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더 필요해서. "애기 카시트도 옮기고, 차 안도 청소하느라 좀 늦었어. 봐봐, 네 자리 엄청 깨끗하지?" 줄줄이 늘어놓는 말 어디에도 '미안해'는 없었다. 언니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 뻔뻔함에 분노가 차오르던 찰나, 또 다른 장면 스쳤다. 150cm의 왜소한 몸으로 3kg짜리 카시트를 낑낑대며 옮겼을 그녀. 어릴 적부터 동생보다 작다는 이유로 "동생한테 밥을 빼앗기냐"는 말에 시달렸던 사람. 악성 루머에 억울한 건 나였지만, 167cm 나무 옆에서 서럽다고 맴맴 울던 건 언제나 언니였다.


짜증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콧바람을 길게 내쉰 뒤, 차에 연결된 그녀의 휴대폰으로 유튜브 뮤직을 켰다. 화면엔 알록달록한 캐릭터 영상들이 가득했다. 7세 미만 아이들의 아이콘 '캐치! 티니핑' 주제곡부터 어린이 영어 동요까지. 전형적인 육아맘의 플레이리스트다. 미국 일리노이 캠퍼스를 누비며 얼터너티브 록을 즐기던 멋쟁이 유학생은 어디로 사라졌다. 문득, 우리가 즐겨 듣던 미국 락밴드 Hoobastank의 'The reason' 이 떠올라 첫 곡으로 틀었다.


“와 미쳤다. 지인-짜 오랜만이다!” 언니는 단번에 반응했다. 사십을 코앞에 둔 엄마가 20대로 돌아가기까지 걸린 시간, 단 1초. 노래 한 마디면 충분했다. 들뜬 그녀의 모습 위로 2010년 여름이 겹쳐졌다. 미국에서 함께 보낸, 그리고 언니를 가장 미워했던 시절. 운 좋게 떠난 어학연수지를 일리노이로 정한 건 단연 언니 때문이었다. 낯선 타국에서 유일하다고 믿었던 내 안전지대. 하지만 미국 땅을 밟자마자 그곳은 진입 거부당했고,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졌다. 돈 없는 한국인 유학생에게 동생은 처치 곤란한 짐이었다. 가장 아팠던 건 '제발 연락하지 말라'던 그녀의 냉대였지만, 선명하게 남은 기억 또한 언니였다. 5평 자취방에서 샌드위치 하나로 며칠을 버티며 이를 악물고 공부하던 사람. 나는 종종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밉고 아프다고 고백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 상처가 커질까 손 안에 꽉 쥐고 기도해주었다.


그 후로도 나는 언니 삶의 몇몇 변곡점에 함께했다. 첫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잠겼던 시절, 우리는 5개월 넘도록 아이를 함께 키웠다. 아기의 토사물로 뒤범벅된 옷과 설거지 못한 젖병 더미 속에서 자주 무너지던 그녀 곁엔 내가 있었다. 혼곤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언니를 위해, 나는 장난감에서 나오는 노래를 우스꽝스럽게 개사해 불렀고, 모유수유로 외출조차 어려운 날엔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 와 함께 먹었다. 자기 키보다 더 큰 책임에 짓눌려 거칠게 뱉던 숨이 이따금 내게도 밀려왔지만, 나는 조카를 지키던 언니를 지켰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줄 알았던 자식 때문에 실은 몸도 마음도 곪는 날이 많다는 걸 알아주는 마음 하나가, 스러지던 그녀를 다시 일으켰다.


“가만보면 네(언니) 인생 최저점마다 내가 있었던 것 같아. 뭔가 억울한데?”순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그녀에게 불쑥 던져버린 그야말로 고백 공격. 한마디에, 오래 묵혀둔 항처의 장독대가 덜컥 열렸다. 분명 독 안에 든 감정을 전부 비워냈다고 생각했는데 바닥 어딘가에 찌꺼기가 남아 있었던걸까. 푹 삭은 홍어처럼 코를 찌르는 악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에도 억울한 건 난데, 모양 빠지게 울고 싶은 쪽도 왜 나일까.


격동하는 감정의 펌프질에 한껏 댠아오른 얼굴로 나는 운전석을 슬쩍 쳐다봤다. 언니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눈 한번 껌뻑이지 않고 평온히 운전을 이어갔다. 금세 시뻘개진 눈가를 감추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언니는 눈치채지 못 한듯 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다, 언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아직도 나한테 화내다 말잖아. 내가 더 괴로울까봐.” 사실 언니는 알고 있었다. 내 상처가 줄곧 그녀를 향한 배려였다는 걸. 그녀는 괴로웠던 시절은 기억에서 전부 지웠다면서도, 내 손의 온기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언제, 어떤 손이었는지는 흐릿해도 너라면 분명 날 도왔을 거라는 말과 함께.


어쩌면 언니와 나 사이에 분단선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선을 그을 때마다, 어느 한 쪽이든 나서서 움푹 팬 자국을 여러 마음으로 메워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한 사랑과 늦더라도 끝끝내 도착하는 미안함, 함께라는 위안으로. 아홉 시 반, 임진각 포비 DMZ에 도착했다. 전쟁이 멈춘 평화의 땅에서 우리는 따뜻한 플랫화이트와 쑥차, 무화과 베이글 한 개를 나눠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닿을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던 이들의 애환이 깃든 자리에서 공동 육아 시절을 다시 꺼내놓았다. 많이 힘들었고, 가끔은 서로 애처로워 웃겼고,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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