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고요 감사의 조약돌

남해 여행, 우리가 해냄(下)

by 영글

둘째 날 일정은 제법 빡빡했다. 남해는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섬인데, 우리가 머문 곳은 왼쪽 날개 쪽이었다. 오늘은 반대편인 오른쪽 섬을 한 바퀴 훑어보기로 했다. 주요 관광지가 대부분 그쪽에 몰려 있어 하루 동안 남해의 오른쪽 심장부를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이 목표였다. 동선은 간단했다. 보리암에서 시작해 미조항과 독일마을, 다시 왼쪽으로 돌아와 전통시장까지 크게 한 바퀴를 도는 구성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비 소식이 결국 남해까지 찾아왔다. 첫 일정인 보리암은 금산 정상 아래 자리한 절이라 비 소식은 치명적이었다. 일정을 바꾸려 명소들을 다시 찾아보는데, 다행히 1시간 뒤 비가 멈춰 운 좋게 출발할 수 있었다.


차로 30분을 달려 도착한 금산은 입구부터 바위의 장엄한 기운이 뭉쳐 있었다. 오전 내 내린 비로 안개가 뒤덮여 전설 속 용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초입부터 잔잔하게 시작된 경사는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기울기를 꼿꼿이 세웠다. 그 덕에 부모님과 나는 대화를 멈추고 연신 헉헉 대는 숨소리만 뿜으며 안갯길을 뚫고 올라가야 했다.


보리암 입구에서 찍은 티켓. 비 온 뒤라 분위기가 스산했다.


약 한 시간 반쯤을 내리 걸어 도착한 정상. 날카롭게 깎인 바위 틈새로 세워진 보리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 안팎은 관광객과 신자들로 제법 붐볐다. 가까이 다가서자 목탁이 울리는 소리와 스님이 읊조리는 기도 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절 앞에 서서 바라보는 남해의 전경을 한껏 기대했지만, 끝내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라곤 산 전체를 뒤덮은 뿌연 막뿐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은 풍경을 두고 부모님과 상상의 나래를 펼친 시간이 오히려 더 오래 남았다.


수도권에서는 좀처럼 맡기 어려운 깨끗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나는 잠시간 잊고 있던 회사를 떠올렸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업무와 사람들 사이에서 숨이 턱턱 막히던 내가, 지금은 남해의 산 정상에서 서이토록 가벼운 호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낯설지만 이상하리만큼 설렜다. 마음 한가운데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잔잔한 평온이 내려앉았다. '지금 이대로 충만하다'라고, 누군가 내게 조용히 속삭여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왕 절에 온 김에 아빠와 나는 기도를 드리자며 석굴 안 석조불상을 찾았다. 독실한 기독교인 엄마는 예수님과의 의리를 지키겠다며 절 뒤편에 조심스레 앉아 우리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돌과 돌 사이에 자그맣게 숨겨진 불상 앞에는 이미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다행히 뒤 사람을 배려해 빠르게 기도를 드리는 이들 덕에, 우리 차례가 금세 돌아왔다.


아빠와 나는 불상 앞에 나란히 서서 각자의 마음을 모았다. 아빠가 나보다 5초쯤 더 길게 기도하셨는데, 아빤 무얼 그리 깊게 소망하셨을까. 기도를 마치고 합장한 손을 슬며시 풀어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을 때, 새로 만들어진 합장 안엔 서로의 온기가 머물렀다. 아빠의 기도 내용은 몰랐지만, 그가 건넨 온기로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리암에서 내려와 미조항, 독일마을, 전통시장까지 하루를 가득 채워 발 도장을 찍은 우리는 그날 저녁, 약속이나 한 듯 객실 테라스로 나왔다. 난간 앞으로는 남해가 잔잔히 넘실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통통배와 맞은편 여수의 도시 불빛이 형형한 밤이었다. 숙소 주인장이 챙겨준 컵라면 2개와 독일마을에서 산 빵을 나눠 먹으며 우리는 말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그 고요를 깨고 나는 물었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이냐고. 부모님은 같은 답을 하셨다. ‘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차 안에서도 걸어 다니면서도 고개만 돌리면 보였던 그 바다가 가장 좋았다고 했다. 그토록 남해가 보고 싶었다던 엄마의 소망이 2박 3일의 여행으로 이루어진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놓였다. 뒤이어 라면 국물을 휘휘 젓던 아빠가 바다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특별한 곳이 있었다기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순간이 없다는 게 더 감사해. 아빠는 증말이지 너무 행복했어.”


행복에 형체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나는 해사하게 웃는 아빠의 얼굴에서 행복의 윤곽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여행 내내 우리가 나눈 단어들을 떠올렸다. ‘평화, 고요, 감사, 아름답다, 한가롭다, 고맙다.’ 숙소 옆 해변에 깔린 조약돌처럼 모나지 않고 다정한 말들이었다.


숙소 옆 몽돌해변. 해변 이름처럼 맨들한 조약들이 깔린 작은 해변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격언같았던 이 말은 진실이었다. 한 번쯤 낯선 풍경을 보고, 새로운 맛을 알아가며, 같이 걷고 마음을 나누는 것. 그것만으로 행복은 충분했다. 우리는 틈틈이 파주 밖을 나가자며 서로에게 약속과 용기를 건넸다. "푸흐흐, 다음은 무조건 해남이다!" 아빠의 장난스러운 제안을 품은 채, 우리는 전보다 더 넉넉해진 마음으로 여행의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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