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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년 Oct 25. 2020

저희 어머니께서 우리 엄마가 됐습니다

가족의 완성

"엄마. 일도 바쁘실 텐데 뭘 이리 많이 보내셨어."

"그냥 너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 보냈어. 냉장고에 쌓아두지 말고 오래된 건 바로바로 버려. 그래야 찾아먹게 되니까."

"아이고 감사하여라. 아까워서 어떻게 먹지?"

"얘도 참. 입에 맞았으면 좋겠다."


30년이 걸렸다. 남들에겐 숨 쉬듯 당연한 대화가 우리 모자의 일상에 찾아들기까지 걸린 시간.


5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아버질 만나셨고 이듬해에 결혼을 하셨다. 당시로는 흔치 않았던 재혼 가정이었지만 워낙 어렸던 지라 그런 일에 대한 거부감을 느낄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큰 혼란 없이 가족이 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쉬쉬 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인지라 부모님은 조금 다른 우리 가족에 대해 진지하게 말씀해 주신 적이 없었고 이후 귀동냥과 눈칫밥으로 알게 된 사실들에 충격을 먹은 나는 또 그런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속에 미움을 담은 채 자라났다. 몇 년을 그렇게 듬성듬성 지내다가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때문인지 나는 감정적으로 폭주했고 이 불완전한 가족이 무너지길 빌고 또 빌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찾아온 삼촌이 이제는 너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며 소주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며 들려주신 우리 가족의 슬픈 역사와 기원-(아마도 부모님의 부탁이었을) 따위는 애저녁에 내 스스로 다 알아낸 것들 뿐이었기에 가소로웠고 이제는 다 컸다고 착각해버린 나는 앞으로 가족이니 부모 자식이니 하는 허례허식들은 다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행복한 인생을 꾸릴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을 만큼 나는 막 돼먹어 있었다. 정말 다행히도(?) 나는 그다지 성공적인 삶을 이뤄 내지도 못했고 가족을 잊을 만큼 돼먹지 못한 놈도 아니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을 기르는 것 도 쉽지가 않을진대 자신을 엄마로 생각하지 않게 된 자식을 키운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오직 나만이 선의의 피해자로 고통받는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하던 시절의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참담한 심정은 더더욱 당시의 나로선 헤아릴 수 없었다. 내게는 그저 모든 것이 분노의 대상이었다. 당신들의 무책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마음껏 괴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엇나가고 실패하고 무너졌던 20대의 부끄러운 내 삶마저도 모두 부모님 탓으로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부모님을 핑계로 인생을 망가뜨려선 안된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뒤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나는 더없이 좋은 시절을 허투루 보냈고 어머니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 있었으니까.


슬픔은 다 거기서 거기이고 기쁨은 더없이 기쁜 것이라는 나름의 진리가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다. 아마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즈음해 마음의 벽이 허물어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순간이 언젠가는 찾아오고야 만다는 단순한 사실이 각자의 마음속에 일어 서로의 마음을 두드렸던 것 같다. 연속극에 나오는 극적 반전과 갈등 해결의 계기는 딱히 없었지만 남들한텐 당연한 세월의 이치가 우리에겐 일순간 기적을 일으켰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린 여전히 충분하다 느껴지는 그 이상 그간의 일들을 곱씹기도 하는데 그럼으로 인해 서로에 대한 마음을 더 견고히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싶다. 각자였던 우리 세 식구는 그렇게 조금씩 가족이 되었고 긴 시간 동안 외롭고 괴로웠을 내 어머니는 드디어, 엄마가 되었다.


필요한 건 시간이었고 조금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좋은 순간이 분명히 오고야 말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남들에겐 따분하고 비일비재한 일들이 우리에겐 새롭고 즐거운 상황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과 여느 가족에게나 찾아올 갈등과 다툼 따위 우리는 애저녁에 다 넘고 건넌 산과 바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모자는 공공의 적을 통해 좀 더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적의 정체는 아버지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전형적인 꼰대. 요즘 말로 선비라고 하는데 그 존재 자체가 선비인 아버지의 꽉 막힌(그러나 귀여운) 생활 습관을 같이 흉보면서 우린 좀 더 많고 깊은 대화를 나눈다. 외식도 낭비, 여행도 낭비, 중요한 것은 체면, 걱정할 것은 나라. 곁에 있는 아내와 멀리 타지에서 잘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는 아들의 근황엔 일절 내색하지 않으시는 그 곧은 심지 덕에 모자의 운명공동체는 날이 갈수록 견고해져 가고 있다. 


내 어린 시절의 가족이란 응당 그랬다. 남편의 정서적 부재에 대한 보상을 그 아들에게 찾게 되는 것. 그래서 우리 때의 엄마들은 그렇게나 아들에 목을 매고 그 아들 또한 자신의 여자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찾으려 애쓰는 듯도 하다. 우리 집에 계신 분 또한 예전엔 그렇게나 결혼과 애인을 만들라고 하시더니 요즘 들어서 여자 얘기는 쏙 들어간 걸 보면 은근히 이제야 되찾은 아들의 관심을 아직은 남에게 넘기고 싶지 않아 하시는 것 같다. 그렇게 엄마의 고단했던 삶에는 아들이, 아들의 삭막한 삶에는 엄마가, 가족이 자리 잡았다.




"어머니"


친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부터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었다. 그런 내가 어른스럽고 영특하다며 남들은 추켜 세웠지만 사실상 그건 내가 만든 "거리"였다. 어머니 당신과 나의 관계는 앞으로 이 정도면 될 것 같다고 말하는 일종의 반항이자 경고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그 시절을 이야기한다. 엄마로서, 어른으로서 어린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엄마의 미안함과 아들로서 자식으로서 내 편 없는 집안에서 홀로 외로웠을 엄마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까지.


30년. 


비로소 어머닌 엄마가 되었고 아들은 비타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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