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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Nov 23. 2019

냄비 바닥의 누룽지

외면하면 까맣게 타는 법

보안키를 누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헤진 스티커가 보풀처럼 붙어 있는 와인색 캐리어가 보였다. 5개월만이었다. 현관 턱에 걸쳐진 캐리어 바퀴가 덜컥거렸다. 무슨 말을 꺼낼지 속을 뒤지다 신물이 올라왔다. 화장실로 가는 걸음이 비틀거렸다. 어금니부터 잇몸으로 신물이 스몄다. 가을이가 돌아왔다. 세면대에 까맣게 낀 물때. 변기에 거미줄처럼 쳐진 검은 얼룩이 신경쓰였다. 가을이와 함께였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였던 것들. 속을 게워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변기는 차갑고 무릎은 축축하게 젖었다. 가을이는 얼굴의 반을 가린 머플러를 풀지도 않고 어지럽게 놓인 옷가지를 정리했다. 짐 가지러 왔어. 거짓말. 가을이는 진심을 숨기는 데 도가 텄다.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폭탄처럼 터트린 게 5개월 전이었다.

속이 어지러워 좀처럼 일어날 수 없었다. 가을이가 올 줄 알았으면 사람 사는 집답게 청소도 하고, 오늘 죽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할수록 가을이의 부재가 눈에 띄었다. 카페트에 무늬처럼 놓아진 머리카락 뭉치. 입구가 봉긋하게 솟은 쓰레기봉투 몇 개. 가을이는 좁은 싱크대 앞에 서서 냄비에 쌀을 붓고 있었다. 짐 가지러 왔다면서. 찰방이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떠날 만도 했다. 뒷처리를 하는 건 늘 집 주인인 가을이었으니까. 어질러 둔 집도 가을이의 몫, 하루를 보내며 쌓인 나의 짜증도 가을이의 몫. 생활 방식에 차이가 있었던 거라고 합리화를 해 봐도 내 과실이 뚜렷하게 고개를 밀었다. 짐을 빼겠다고 한 건 난데, 정작 집을 나간 건 가을이었다. 된장찌개와 밥을 지어놓고, 설거지도 다 하고. 빨래까지 돌려놓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포근한 냄새가 났다. 가을이는 밥을 안치고서야 머플러를 풀었다.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가을이나 나나 잘 지낸 건 아닌 것 같아 등을 돌려 이불을 정리했다.

가을이가 분주하게 집 구석구석을 뒤지는 걸 바라봤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물건들이 보물처럼 쏟아져나왔다.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렸다. 가을이는 캐리어를 펼치며 냄비 확인을 부탁했다. 소매를 끌어올려 냄비 뚜껑을 열었다. 뿌연 김이 올라왔고 그 아래에 누룽지가 깔려 있었다. 가을이는 옷가지를 던져 두고 옆으로 다가왔다. 하마터면 까맣게 태울 뻔했다며, 미리 끓여 둔 뜨거운 물을 살짝 부었다. 자글거리는 소리가 뒤집어진 속을 토닥였다. 앉아 있으라는 가을이의 말에 금새 진정된 속이 부글거렸다. 가을이는 미련하다. 미련하다 못해 바보 같다. 애초에 친하게 지낸 게 잘못이라는 둥, 폭언을 내뱉은 사람에게 누룽지를 끓여 주고, 여름에 이틀 꼬박 걸려 담은 밤조림을 꺼내어 주고 차를 우려 주는 건 반칙이다. 죄책감을 심으려는 못된 심보다. 나는 다시 가을이의 호의를 외면했다.정성스럽게 차려진 상을 뒤로 하고 돌아누웠다.

연락하겠다는 말이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캐리어도 없고, 가을이가 두고 갔던 신발도 모조리 사라졌다. 누룽지가 발자국처럼 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숟가락으로 냄비 바닥을 긁어냈다. 잘 구워진 빵처럼 색이 고왔다. 밑바닥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숟가락을 세로로 들고 냄비 바닥에 기스가 나도록 긁어도 눌어붙은 밥알을 떼어낼 수 없었다. 이미 떼어낸 누룽지 조각들은 뜨거운 물에 젖어 눅진해져 있었다. 휴대폰을 집어들어 메세지를 보냈다. [일주일 내로 짐 챙겨서 나갈게. 오전 10:48] 전송하기가 무섭게 읽음 표시가 떴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책상 아래 눕혀 둔 캐리어를 꺼냈다. 옷장을 열자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하나씩 꺼낼 때마다 가을이에게 의지했던 날들이 먼지처럼 날렸다. 진동이 울렸다. 외면하기가 무섭게 우리의 관계는 까맣게 타버렸다. [잘 지내. 오전 10:56]

캐리어를 채우다 속이 쓰려 매트리스에 앉았다. 차갑게 굳은 누룽지가 보였다. 숟가락에 누룽지가 붙어 있었다. 가을이는 누룽지를 잘 만들었다. 과자처럼 바삭거리는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도, 뜨거운 물을 부어 부드럽게 해도 맛있었다. 정신없이 누룽지를 먹고 나서 어금니에 박힌 누룽지를 떼어내려 애쓰는 표정이 웃겼는데. 냄비 채로 싱크대에 넣었다. 뜨거운 물을 틀었다. 물결이 이는 방향대로 밥알이 바쁘게 움직였다. 외면하면 까맣게 타는 법. 뜨거운 불구덩이에 방치해도 멀쩡한 건 멀쩡하다. 눌어붙는 쪽이 잘못이다. 친구와 연락을 끊는 게 이렇게 절절할 일인가, 무슨 3류 드라마야? 딱딱하게 굳어 눌어붙은 정이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밥알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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