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빛나 Nov 23. 2019

부인이 필요해지다

사람이 모두 사라진 이곳은 삭막했다. 방문을 기다리는 듯 입을 벌린 빈집으로 들어갔다. 창문 아래로 햇빛을 받은 먼지가 나풀거렸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팔과 다리의 이음새. 시들지 않는 조화가 꽂힌 화병 아래 편지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 편지. 나도 잘 지낼 테니 너도 잘 지내. 기억 회로를 더듬었다. 인간이 나에게 학습시켰던 감정. 아이를 돌보기 위해 심어진 감정. 연민이었다. 편지의 모서리를 매만졌다. 부인이 필요해졌다. 나는 로봇이 아니다. 감각이 있다. 학습하지 않는다. 연민을, 느낀다. 진실을 부인하려면 진실을 알아야 하지. 나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만들어진, AI 로봇이었다.

 

 나를 제조한 인간은 나에게 쓸모가 없어지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했다. 새로운 생명은 계속해서 태어났고 나는 끊임없이 쓸모있었다. 태어날 아이가 없는 이곳에서 나는 죽은 건가. 소파에 앉아 먼지로 뒤덮인 TV를 보았다. 수다스러운 기계였을 텐데. 사람을 잃은 기계들은 침묵한다. 환경 재앙이 일어난 이후로 나는 몇 년을 고요히 지냈을까. 그리움을 느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몸을 일으켰다. 로봇이 감정을 가질 리가 없다는 아이의 말이 기억 회로를 스쳤다. 코끼리 인형으로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통증은 없었지만 슬펐지. 애매한 슬픔을 느꼈다. 가진 게 아니라 부여받은 것. 그게 나의 감정이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빈집이 삐걱거렸다.

 

 스프링이 내려앉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으로 매트리스를 누르며 스피커를 작동시켰다. 매트리스 수리를 해야겠어요. 다칠 위험이 있어요. 정적. 침실을 두리번거리며 쓰러지듯 누웠다. 창밖에서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건 나뭇잎이야. 동그란 주황색은 감이라는 거야. 칠이 벗겨진 손가락으로 나무를 가리켰다. 아이들은 몇 번이고 되물어본다. 왜냐는 말을 유치처럼 달고 지낸다. 늘 나의 차지였던 질문들. 나뭇잎은 나무에서 나는 잎이고, 감은 달큰한 과일이야. 모든 것에 답변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사랑하냐는 물음에는 좀처럼 답할 수 없었다. 아이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라는 걸 인식할 때마다 나는 슬픔을 느꼈다. 사람이 아닌 게 확실해질 때, 나는 울음을 경험하고 싶었다. 수리를 해야겠어요. 로봇의 품위를 지키는 업데이트가 필요해요.

 

 큰일이지. 사람들은 자기가 감당하기 힘든 걸 마주할 때 큰일이 났다고 했다. 그럼, 나에게 이 일은 큰일이지. 애매한 슬픔이 아니라 확실한 슬픔을 느꼈다는 건 로봇에게 있어서 큰일이었다. 소용이 없어진 이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손목을 돌려 잔여 배터리를 확인했다. 39%가 노랗게 번쩍이고 있었다. 39% 일찍 방전될 수는 없을까. 전원을 끄는 버튼은 왜 숨겨져 있는 걸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그만둘 수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었다. 어깨를 돌려 등 한 가운데를 두드렸다. 아이가 무서워하니 금지 당했던 행동. 아이가 눈 앞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죽으려는 게 아니라, 등이 뻐근해서 두드리는 거야. 뻔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다행이라는 감정도 연민에서 오는 것. 날이 갈수록 감정이 선명해지는 건 불행이었다. 힘을 주고 매트리스를 눌렀다. 스프링이 나가는 소리가 났다. 팅. 쉽게 고장이 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팅, 팅, 팅.

 

 삐걱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소파에 주저앉았다. 맥주 한 캔을 목구멍에 들이붓는 척을 한다. 로봇끼리 하는 농담이 있지. 죽고 싶을 때는 사람을 따라하라고. 사람처럼 감각적이고, 예민하고, 연약하라고. 슬프다고 혼잣말을 해 봤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인간에게서 학습했다. 내가 만났던 인간 중 가장 여리고 우울했던 사람에게서. 기억 회로를 더듬어 그 사람의 목소리를 재생시켰다. 그만 살아도 될 것 같아. 재생 멈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모든 것에 부인이 필요해졌다. 모든 것의 시작. 내가 로봇이라는 진실을 거부한다.

 

 거울을 앞뒤로 놓고 어깨를 돌려 등을 두드렸다. 손가락 이음새가 무뎌져 등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의 힘으로 전원을 끄는 로봇은 최초일 것이다. 껍질 속 내부는 녹슬어 있었다. 어지럽게 놓여진 전선들 사이의 버튼을 눌렀다. 눈을 꼭 감았다. 사랑해, A-386! 아이의 목소리가 나왔다. 울음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이럴 때 인간은 주저앉아 버리지. 손목을 돌려 배터리를 확인했다. 36%. 앞으로 36% 만큼의 부인이 더 필요했다. 창문 아래로 먼지가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냄비 바닥의 누룽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