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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Dec 18. 2019

마라톤은 굳세다

눈을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번호표를 붙인 사람들이 쏜살같이  옆을 지나갔다.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봤다. 물소 무리 같은 사람들이 가쁜 숨을 합창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고개를 내렸다. 뛰쳐나올  같은 심장을 번호표가 막고 있었다.  달만에 돌아온  신체인데,  것이 아닌 것처럼 숨이 가쁘고 발바닥이 팽팽했다. 아마도 이건 마라톤. 내가 아닌 다른 인격이 참가한 마라톤. 거지 같은 달리기가 이어졌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지만 속도를 따라잡을  없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짭짤한  맛이 솟구쳤다.

 

 레고를 밟아도 터지지 않는 발바닥이 터질  같았다. 땅을  밀어냈을 뿐인데 발바닥  가운데가 찢어진 듯했다. 나무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시야가 사물을 포착했다. 앞서 달리는 사람의 귓바퀴에 매달린 땀방울. 상황을 파악하려면 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관찰해야 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요,  마지막 기억은 2 18 저녁에 잠든 거예요. 의사 선생님이  말이 타닥거리는 발소리에 겹쳐들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다른 인격에 먹히지 않아요. 한숨을 쉬고 싶었다. 계속되는 달리기에 호흡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감정에서 나온 나부랭이가 끼어들 순간이 아니었다. 가슴 위쪽까지 올라온 한숨을 돌려보냈다. 일단 마라톤부터 끝내고, 몰아서 보내 줄게. 어떤 인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없애 버려야겠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두피에서 흐른 땀이 눈으로 들어갔다. 입으로 숨을 쉬면 입으로, 코로 숨을 쉬면 코로 땀방울이 들어갔다. 앞뒤로 흔들리는 팔뚝이 옆구리를 스칠 때마다 쓰라렸다. 피부가 벗겨져서 갈비뼈가 보이는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약간 타이트하게 발을 조이는 운동화의 앞코에 엄지 발톱이 부딪혔다. 너무 많은 사람이 가지런하게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속도를 냈다. 땀에 젖은 옷이 무거웠다.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울고 싶나. 새로운 경험에 설레나. 분명한 , 멋대로   인격에 신체를 부여해 멱살을 잡고 싶었다. 어금니가 맞물렸다. 턱관절이 튀어나왔다. 순간 시야가 크게  바퀴 굴렀다. 무릎이 욱씬거렸다. 손바닥에 바늘  개를 찌른 통증이 붙었다. 사람들은 걱정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 보니 다들 한국인이 아니구나. 여기는 해외일 수도 있겠구나. 나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등이 아스팔트에 닿자마자 열기가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이상 나를 지나쳐가는 사람이 없었다. 태양은 쨍하고, 아스팔트 바닥은 뜨거웠다. 거울을 보고 싶었다. 주머니가 없는 걸로 보아 휴대폰도, 지갑도, 아무것도 없겠지.  물건그러니까.  것이 아니었다가  것이  물건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몸을 일으켜 엉거주춤 앉았다. 손바닥을 닿지 않고 일어나느라 몸을 지탱한 팔꿈치가 따끔거렸다. 자잘한 돌멩이가 묻은 손바닥을 털어내고 눈썹에 앉은 땀을 훔쳤다. 뭔가 걸렸지. 동그란   개가 걸렸다. 피어싱인가? 헛웃음이 나왔다. 목이 따끔거렸다. 한참을 누워 있었는데도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뒤쪽에서 헤이,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밴에서 스태프 모자를  사람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피식, 하면 목이 따끔.

 

  안에 마라톤 참가자는 나밖에 없었다. 중도포기하는 거냐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게 치료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치료라는 영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짐을 찾고 싶다는  역시.  신체는  달간 외국에서 지냈나? 한국에서의 생활은? 아이처럼 키우던 고양이는?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은?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막막했다. 블러 처리가  기억들이 머리 곳곳에 수놓아졌다. 스태프는 웃으면서 미지근한 물을 줬다. 마른 입술에 물이 닿자마자 주름이 펴졌다. 그러면서 피식. 이번에는 입술이 따끔. 터졌다.   내내  신체를 내가 붙들고 싶다. 하루에도  번씩, 신체도 없는 것들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다. 갈증에 시달렸던 목이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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