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완이 Dec 19.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활용하여 마음의 판도 바꾸기

힘들다. 서럽다.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관용구가 있다. 글을 쓸 때 판도를 바꾸는 것은 ‘그래도’, ‘하지만’,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관용구는 길이 면으로나 활용 면으로나 마이너하고 가성비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용구를 써야만 문장이 본연의 의미를 제대로 뽐내게 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열 개가 넘는 획을 그어서라도, 완고한 표정으로 몇 개의 글자를 종이에 더 올려놓아야 할 지라도 말이다.


이 표현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조금 무게를 보태어 표현하자면) 내게 있어서 이 관용구는 삶에 대한 투지를 꾹꾹 눌러 담은 표현으로 해석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재능을 드러내는 구석은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놀랍도록 일률적인 능력과 흥미를 기반으로, 노력하면 실력이 늘다가 쇠퇴하고 다시 늘기를 반복하며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삶ㅡ여기서 평범한 삶이란 물 흐르듯 시간을 흘려보내며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삶이다ㅡ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열과 성을 다해하려고 노력했다. 돌이켜 보면 할 수 있는 것이 노력밖에 없어서 그랬다. 이것이 내게는 흐르는 대로 살지 않고, 단 한순간이라도 의식적인 상태로 살아보려는 투지로 읽히는 것이다.


두 번째, 나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격려로 쓰일 수 있다. 난 직장인이 되고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출근과 퇴근이라는 굴레에 묶여 산 것이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체념 상태에 이르렀다. 열정이라는 단어와 친밀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참으로 희미하다. 적어도 직장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타협과 체념과 모른 척과 합리화가 필요했다. 지나친 열정은 타인을 태워버릴 수도 있고, 정작 내가 말소될 수도 있다. 직장인이 되고 겪는 스트레스는 여태 살아온 삶에서 경험한 스트레스와는 차원이 달랐고, 까딱하면 정신건강이 낭떠러지로 직행할 수도 있어 위험천만했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 보니, 그곳에서 무력감을 겪거나 소속감,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면 마치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노력했으며, 퇴근 직전까지 안간힘을 썼고, 직장에서 만나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니 괜찮다.” 순탄하지 않고 그다지 실적도 나지 않는 직장에서의 무력한 나의 모습에 괴로울지언정 얼마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사용하여 내가 노력하고 있고 열심이고 존재 자체로 괜찮은 사람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며 나 자신을 다독이고 격려하는 것이다.


가끔 습관적으로 다소 자기비하적이고 자조적인 생각들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부단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들이밀어 생각의 판도를 바꾸려 노력한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내가 존재하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미약한 힘만 있다면 기어서라도 앞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기쁨을 음미하는 것의 중요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