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가사까지 다 써놓고 완성하지 못한 미발매곡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 계속 마음에 차지 않았던 노래. 이별의 순간마다 억지로 매번 맥북 깊숙한 폴더에서 꺼내 듣던 이 노래를 오늘 밤에는 꼭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아니, 할 수 있을 것 같다.
며칠 전, 충주에서 있었던 공연의 출장 일정을 마치고 천안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녹초가 된 몸에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 때문인지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의 라이트가 물감처럼 흩어져 보이던 고속도로 위에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얼마만이야. 목소리 들으니 참 좋다."
잠을 깨기 위해 잔잔한 노래 밖에 없던 플레이리스트를 바꾸던 순간, 가수 적재의 새벽통화의 첫 소절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순간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노래를 들은 지 얼마나 됐을까. 의도적으로 피했던 건지, 우연히 안 들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간간히 보이는 가로등 불빛이 차창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며칠 전 있었던 통화가 떠올랐다.
"여보세요?"
"...나야. 통화 괜찮아?"
"응, 괜찮아."
5년 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헤어진 뒤로 SNS도 정리했고, 공통된 지인들도 거의 없었기에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화를 받는 순간 긴장보다는 궁금함이 먼저 들었다.
"요즘 어때? 잘 지내?"
"응, 뭐 별일 없이. 너는?"
"나도 그냥 그렇게 지내. 바쁘긴 한데 재밌어."
"그렇구나. 다행이다."
이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서로 울고불고 몇 번이나 통화를 했었다. 짐을 정리하겠다는 핑계로, 남아있는 물건을 돌려주겠다는 이유로. 서로의 목소리에서 불편함이 묻어났고, 무슨 말을 해도 어색했으며, 통화를 끊고 나면 며칠씩 그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왜 저렇게 말했을까', '그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하루 종일 답답하곤 했다.
"혹시 무슨 일 하고 있어?"
"응, 나 공공기관에서 일해. 음악 관련된 일."
"진짜 음악을 하는구나. 그렇게 좋아했는데. 잘됐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함께 있을 때 내가 밤새 노래를 만들던 모습을 그녀는 누구보다 많이 봤었다.
"나도 예전에 네가 만든 노래들 들었어. 인스타에 올린 거."
"어? 너 내 인스타 알아?"
"미안. 이상한 사람 같지?"
그동안 서로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씩 내 근황을 확인하고 있었다는 그녀의 말에 많이 놀랐다. 몇 년 전에 이런 상황이 왔다면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가끔씩이라도 나를 생각해 주는 것에 그냥 고마운 마음만 들었다.
"너야말로 요즘 어떻게 지내?"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서로의 일상과 취미, 요즘 관심사에 대해서. 헤어진 직후의 어색한 침묵들은 온데간데없었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편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있잖아. 나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그래? 잘됐네."
"응. 좋은 사람이야. 곧... 결혼할 것 같아."
"그렇구나. 축하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진심이었다. 정말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괜찮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감정들이 뒤엉켜 몇 달을 괴로워했을 그 시절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마워. 네 말 들으니까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내가 뭘."
"너도 좋은 사람 만나."
"응. 언젠가는."
"그럼 나 끊을게. 몸조심하고."
통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이상하게 개운했다. 헤어진 사람과의 통화가 이렇게 편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그 사람이 잘 지낸다는 사실이, 곧 결혼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내가 낯설었다.
비는 그쳤지만 도로는 여전히 젖어 있었고, 그동안 노래는 혼자 몇 바퀴를 돌아 또 후렴구로 넘어가 있었다. 가사를 따라 중얼거리다 지금껏 완성하지 못한 노래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태 나는 그녀뿐만 아니라 지금껏 보낸 수많은 이별을 정리하지 못했고, 담담해지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괜찮아지는 게 두려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건 삶의 방향을 잃는 일이라고 믿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다. 이별할 때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굴었던 내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 이별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반복되는 여러 번의 과정에서 감정도 언젠가는 흐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픔이 선명했던 그날의 기억들도 결국에는 시간 속에서 부드러워진다는 것도 말이다.
하루 종일 화창하더니 글을 쓰는 지금,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비도 내렸다 그치길 반복하는데, 내 마음이라고 다를까. 다시 찾아온 비도 숱한 이별들처럼 이제는 더 덤덤히 받아들이려 한다. 이제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노래의 가사처럼.
"이별은 늘 그렇게 지나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