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3.
인털루드(interlude)는 음악이나 극에서 곡과 곡 사이, 또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삽입되는 짧은 간주곡이나 막간극을 의미한다. 단어의 어려운 뜻보다 '간주'라는 말이 더 익숙할지도. 어느 노래든 가사 없이 악기 소리만 흐르는 순간이 있다. 그 동안 나는 방금 들은 가사를 곱씹기도 하고, 다음에 올 멜로디를 기대하기도 한다.
세상이 분주해지는 3월, 회의를 마치고 건물 1층 로비로 내려오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 너 맞지?"
돌아보니 대학 시절 정말 친했던 지연이었다. 3년? 아니, 4년쯤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했다.
"야, 여기 왜 왔어?"
"윗층에 거래처 있어서. 너는?"
"나도 회의 때문에. 진짜 오랜만이다."
서로 어색하게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자" 한마디면 됐을 텐데, 이상하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다가 각자 약속이 있다며 가볍게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계속 지연이가 생각 났다. 지난주 일요일, 3월 2일은 내 생일. 예전에는 지연이가 제일 먼저 축하해주곤 했는데, 올해는 연락이 없었다. 나도 지연이 생일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로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우리는 멀어져 있었다.
조용할 날이 없던 20살, 지연이와 나는 서로 다른 과였다. 우연히도 신입생으로 처음 갔던 각자 학과의 개강총회 뒷풀이가 같은 술집이었다. 어느 순간 두 학과가 자연스럽게 섞여 마시게 되었고, 우리는 같은 과인 줄 알고 한참을 함께 마셨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서로 다른 과였다는 걸 알게 된 우리. 그날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지만, 훨씬 세상을 멀리보던 지연이는 내가 많이 의지할 수 있는 친구였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뒤 카페에서 커피 두 잔에 서로의 고민을 훌훌 털어놓고 헤어지곤 했다. 지연이는 내가 짝사랑하던 같은 과 동기에게 10번을 고백할 동안 수없이 많은 농담과 응원을 해주기도, 내가 입원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주기도 했다. 나도 지연이가 가족사 때문에 힘들어할 때나,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며 밤새 뒤척일 때면 자취방 앞 편의점으로 불러 위로해주고, 우린 아직 젊으니 뭐든 할 수 있을거라며 용기를 북돋아주곤 했다.
내가 전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연이는 취업에 성공했다. 면접 보러 갈 때 입을 옷을 고민하면 같이 쇼핑을 갔고,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축하도 해줬다. 1년 뒤 나도 지연이를 따라 겨우 원하던 회사에 취업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나는 도망치듯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호주에서 1년을 보내는 동안 지연이와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다. 한국이 그리울 때마다 지연이는 "힘내, 거기서 좋은 경험 많이 하고 와"라며 나를 응원해줬다. 나도 회사에서 팀장이 된 지연이의 고민을 들어주며 "너도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여전히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대학이 있던 천안으로 다시 내려왔다. 지연이의 직장은 서울이었다. 물리적 거리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만남의 간격도 벌어졌다. 한 달에 한 번 보던 게 두 달에 한 번이 되고, 결국엔 생일이나 명절에 "잘 지내지?"라는 메시지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엔 모든 것에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연락을 안 하니까 얘도 안 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 '관계가 이렇게 쉽게 멀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는 걸 알게 됐다. 지연이가 나를 싫어하게 된 것도, 내가 지연이를 멀리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지연이는 서울에서 회사 생활에 적응하며 바쁘게 지냈고, 나는 천안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 시간 동안 우리의 일상은 각자에게 맞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져 갔다. 지연이에게는 회사 동료들과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을 테고, 나에게도 천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우리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연이에게 지난 시간을 빌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해 소파에 앉아 지연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엔 밥이나 한번 먹자."
"그래, 나도 반가웠어. 연락할게."
답장을 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는 더 이상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관계가 끝난 것도 아니다. 노래와 노래 사이에 간주가 있듯, 우리 사이에도 이런 쉼표 같은 시간이 필요했을뿐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나를 더 알아갔고, 지연이도 그랬을 테니까.
몇 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우연히 마주친 우리는 여전히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만 각자의 멜로디를 조금씩 바꿔가며 부를 뿐.
"간주는 음악에만 있는 게 아닐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