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가적일상추구 May 04. 2021

장자(莊子)- 13편 천도(天道)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장자 13편 천도는 모두 11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천도의 주요한 논지는 유위(有爲)를 버리고 자연의 무위(無爲) 적 삶인 허정. 염담. 적막. 무위의 상태를 지향하여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도가적 삶의 이상향을 추구할 것을 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도 와닿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10장과 11장의 주요 논지이자 노자 56장의 주제인 지자불언언자부지(知者不言言者不知)의 교훈으로 더 각인되어 있다.그럼 먼저 노자 56장에서 지자불언 언자부지(아는 자는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가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아는 자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감각기관)을 막고, 그(지식의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엉킴을 풀어주며, 그 빛을 조화시키고,

    그 먼지에 동화되니 이를 일어 현동(玄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가까이할 수도 없고 멀어질 수도 없으며,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으며, 귀하게 여길 수    없고 천하게 여길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귀하게 된다.

                                노자(老子)- 56장 中    


사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려서부터 자주 듣던 교훈적(?) 이야기가 떠오른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기에 그 누구도 무어라 하지 않을 것이고 나아가 그 어렵다던 중용의 미덕을 지키는 자가 될 터이니 어찌 귀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디 그렇게 가만히 있기가 쉬운 일이던가?

내 경험, 내 지식, 내가 지혜라 여기는 생각 등등 나한테는 귀중한 것들이지만 남들이 보면 딱 아집(我執)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내주장만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 마음에 깃든 기본 심성인지라 그걸 억누르고 가만히 있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했던 것이며 그 중간은 중용의 덕이 될 터이니 그렇게 덕이 쌓이면 세상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생각하니 이 말이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나온 귀한 지혜임을 나이 사십이 훌쩍 넘어 깨닫게 된다.장자 13편 천도 10장에서도 그 지자불언언자부지(知者不言言者不知)가 소개되는데 노자의 보다 그 개념이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소개하면 이렇다.


세상 사람들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도(道)를 귀중히 여긴다. 그런데 책은 말에 불과하고, 말에는 귀한 것이 있다. 말이 귀한 까닭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의미에는 가리키는 것이 있는데, 의미가 가리키는 것은 정작 말로써 전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말을 귀중하게 여기 책을 물려준다. 세상은 그것을 귀중히 여기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그들이 귀중하다고 생각할 뿐 진짜 귀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중략 -

그러므로 아는 자는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세상이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장자 13편 천도 中    


이쯤 되면 스위스의 언어구조주의자 소쉬르의 철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책에 기록되어 있는 도를 귀중히 여긴다는 부분과 말이 귀한 것은 의미를 가리키는 것인데 의미가 가리키는 것은 정작 말로써 전달할 수 없다고 밝히는 두 가지 것이 개인적으로 소쉬르의 주장과 의미하는 바가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되는데 한번 살펴보자.


장자는 사람들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도(道)를 귀하게 여긴다고 하나 책에 기록된 도(道)는 과거의 사람들이 형이상학적 개념인 도(道)에 대하여 설명한 것으로 귀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고 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유기체로 봐야 한다고 했는데 도가(道家)에서는 도(道)라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는 것에 대해 바로 노자 1장에서 비판적으로 이야기한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라고 부르면 도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형이상학적인 것을 유기체인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노자도 소쉬르도 모두 모순으로 지적하는데 이는 소쉬르의 통시언어학과 공시언어학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고 그리고 동시대적 공통성을 기본 전제로 변화하는 인간의 언어로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것의 한계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미 변해버린 과거의 사람들이 책에서 설명한 도를 귀하게 여길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말은 의미를 가리키는 의미는 정작 말로써 전달할 수 없다고 하는 부분인데 소쉬르는 언어체계는 기호체계이며 기호는 뜻과 말소리, 즉 기표와 기의가 결합한 것이며, 이들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 하였다.

 비교적 명확한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에서조차도 연관성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저 그렇게 부르기로 한 언어 집단의 약속으로 애초에 그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존재와 더불어 성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엄마 하면 대립되는 이미지로 아빠가 존재하기에 그 개념이 성립하며 개와 고양이, 남자와 여자, 바다와 산이 이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형이상적인 개념은 어떠한가? 명확한 사물도 없는 개념을 반대화된 이미지 없이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노자와 장자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언어화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지자불언언자부지(知者不言言者不知)의 지혜를 그토록 설명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2,000년이 훌쩍 뛰어넘는 세월전에 현대 언어구조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소쉬르의 개념을 이미 이해한 듯한 그들의 선견지명이 놀라운 따름이다.


어려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어지는 11장에서는 환공과 윤편의 유명한 일화를 통해 언어를 통한 개념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또한 그것이 무위(無爲)의 지혜에서 어긋남을 설명하고 있다. 이 또한 간략하게 살펴보자.            


환공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윤편은 대청 아래서 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는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대청으로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외람되지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니라." 윤편이 다시 물었다. "그 성인이 살아 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이미 돌아가셨다." 윤편이 말했다.

"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와 껍데기일 뿐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 깎는 놈이 어찌 그에 대해 왈가왈부한단 말인가?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한다면 무사하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윤편이 해명했다.

"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퀴통의 구멍을 깎을 때 느슨하게 하면 헐렁해서 견고하지 못하고, 빠듯하게 하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느슨하지도 않고 빠듯하지도 않은 것은 손에 익고 마음이 그에 호응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비밀이 그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제 아들에게도 일러주지 못하고, 제 아들 역시 저로부터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나이 칠십이 되어 늙었는데도 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과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그런즉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일 뿐입니다."

                                                장자 13편 천도 中    


윤편은 위와 같이 말하고 살았을까? 아니면 죽임을 당했을까?

장자가 원한 모범답안에 가장 부합하는 말을 했기에 아마도 환공에게 후한 상과 함께 천수를 누렸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참 어려운 이야기를 쉬운 우화로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생각해 보면 언어의 모호성을 같은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장자(壯者) 역시 모순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에서 영원불멸의 진리와 자아를 찾아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 오로지 언어이었기에 그렇게 말하는 장자는 오죽하랴 싶을 정도이다.

지자불언언자부지(知者不言言者不知) 알듯 말듯 이 미묘한 말의 진리는 역시 언어로 100%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이해했다 해도 언자부지이기에 말로 설명하긴 애초부터 모순인지도 모르겠다.어려운 얘기는 치차하고 그저 '가만히 있음 중간은 간다'라는 말의 의미를 확대해석해보며 중간이 아닌 최고의 덕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장자 13편 천도(天道) 주요 내용보다 인상 깊었던 마지막 두 장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염화미소(拈華微笑)를꿈꾸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