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이 책이우리에게 무엇을줄 수있을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책을 산지가 10년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
한때는 늘 베스트셀러 목록에 몇 년을 올라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 좀 인기가 누구러 졌는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근래의 현상이다. 그런데 왠지 나의 책장에서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이 책이 나의 눈에 유독 띄니 책을 꺼내여 십여 년 전의 들큼한 책 냄새를 맡으며 차근차근 읽기로 했다.
우선 나에게 그간 궁금했던 점은 하나였다.
과연 이 책이 무엇이길래 영미권에서는 10여만 권 팔린 책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200만 권 이상이나 팔려나가는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렸는가이다.
왜 지금 우리에게 사회정의가 담론이 되었을까? 이 부분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과연 이 책이 그것에 대한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추가하여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 읽기로 하였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왜 유독 이 책이 신드롬에 가까울 정도 지난 10여 년간 읽힌 배경에 관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히 유린 당한 식민지에 불과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암울의 시기를 빠져나올 즈음 양대 이데올로기의 극단적인 대립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중엽부터 불과 20여 년 전까지는 그간 뒤처진 산업사회로의 발 빠른 변신과 자유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수호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하면 반공의 이데올로기 지키기에 급급했었다.
그러다 보니 발전과 자유수호라는 두 개의 슬로건 앞에 인간의 존엄이라는 더 앞선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 아니 언급을 하면 극단적으로 말해 빨갱이로 몰아세워 숙청해버리면 끝나는 사회 속에 살아왔다. 6.25전쟁이 끝나고 군인정치시대라 할 수 있는 제6공화국 이전의 우리 사회와 이탈리아의 파시즘 국가라 할 수 있는 무솔리니 정권과 비교를 했을 때 어떤 부분에서는 그 파시즘 정권보다도 못 했던 것이 우리네 현실이었다고 나름 생각하는 바이다.
결론적으로 과거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이라는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마땅한 것이 산업 발전과 반공이라는 두 이데올로기에 묻힌 것이 현실이었다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지난했던 민주화 투쟁을 통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사회정의 실현(사실 이것이 제5공화국 즉 전두환 정권의 슬로건이었던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의 목소리가 나올 즈음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늘 경제 위기가 들이닥쳤다.
1997년의 IMF 외환 위기, 2008년의 서브프라임발 국제 금융위기해서 또다시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경제 안정을 위해 국민 대다수가 희생해야 하는 쉬운 이데올로기로 국민들의 존엄을 위하는 사회정의에 대하여는 논외로 접어 두어야 하는 과정을 다시금 10년 주기로 반복해야만 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의 존엄에 대해 논의할 틈 없이 21세기를 맞이하고 10년을 보낸 즈음 그나마 한숨을 돌리고 사회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하버드대학교의 마이클 샌델이라는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 과연 이 책이 2020년 대한민국식 사회의 정의 정립에 도움이 될까?
이 2차적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체성을 기본 전제로 깔고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가 어떤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입장하에서 사회를 보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그는 1953년 미국에서 태어나 27살에 하버드대학교 최연소 교수가 된 사람이다.
그곳에서 현재까지도 정치철학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그의 스펙이라고 한다면 이런 스펙은 어떤 배경하여 만들어졌을까 하는 질문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사상적 뿌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우선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본 틀은 영국에 있을 것이다.
영국 사람들이 넘어와서 만든 국가이기에 그들은 영국의 언어를 쓰고 그들 사상의 틀 역시 영국의 것들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잘 알고 있듯이 영국은 의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싹을 터 꽃을 피운 국가로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자본주의의 반발로 공산주의 혁명 또는 사회주의적 변모를 모색했던 것과 달리 영국은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논리에 맞춘 정치. 윤리가 발달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험론에 입각한 합리주의적 사고로 이는 미국으로 이어져 실증주의 철학으로 발전하며 철저히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해 움직인 곳이다.
특히,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재임 시절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극단적인 거대 금융 독점자본가들이 전세계적으로 자본 지배를 지원하는 정책을 펴는 등 우선적으로 자본의 자유지상주의가 극에 달한 국가인다.
그래서 유럽의 선진 국가와 다르게 사회보장 등의 공적 복지사업보단 기업의 성장을 통해 국민의 소득수준을 올려 분배의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경제 메커니즘이 주를 이루는 사회이다.
이런 배경하에 마이클 샌델 교수는 자본주의 미국 사회의 백인 기득권층 최상위에 있는 사람으로 자본주의 미국 사회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사회정의에 대한 논리를 펴기에 그간 사회정의라는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최상의 가치를 심도 있게 논해 본적도 없는 우리에게 그의 이론은 너무 멀리 가 있거나 우리 사회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사고를 이식하게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제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 미국의 유명 단거리 코치를 데려다 뜀박질 연습을 시키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전제로 책을 읽으니 정말 한참 멀리 나간 이야기들은 하고 있었다.
우선 마이클 샌델 교수는 미국 사회에서 사회정의를 보는 세 가지 관점에 대해 여러 가지 딜레마적 상황에 대한 예를 들며 각각의 한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비판한다.
그 세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회정의 실현
2. 자유지상주의에 입각한 사회정의 실현
3. 공동선에 바탕을 둔 사회정의 실현
우선 영국의 철학자 밴담이 주장한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가치로 우리에게도 꾀나 익숙한 말이다. 이 주장의 단점은 최대 다수에 포함되지 않는 최대 소수의 희생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자유지상주의인데 이것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위에서 이야기한 공리주의의 단점을 보완하지만 소수에 대한 배려가 자칫 그들의 방종을 방임할 수 있다는데 단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사회의 올바른 목적 추구라 할 수 있는 '텔로스'에 착안한 공동선 추구에 바탕을 두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이 주장의 단점은 일차적으로 사회의 '공동선共同善'을 국가가 정하고 추구한다는 것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국민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철학적 맹점과 과거 전체주의 국가처럼 왜곡된 공동선이 가져오는 비극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마이클 샌델 교수는 지적한다.
사실 우리 사회는 밴담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사회정의를 추구해 왔다고 할 것이다.
공산주의로부터 국가를 지키고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 경제를 개발시켜 국민 생활의 안정과 복지 향상을 꾀한다는 명분이지만 오늘날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반대로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200만 부 이상 팔리는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이 분 것 아닌가 싶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와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 책이 쓰인 2010년 기준으로 새로운 미국 사회의 정의 정립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사실 당시 미국의 사회정의는 1971년 발간된 존 롤스의 '정의론'에 입각하여 추구되어 왔다고 한다.
마이클 샌델 교수 역시 존 롤스의 '정의론'을 수용하고 비판하며 그의 정치철학을 강의하였고 이 책에서의 결론도 그런 기조하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서의 사회정의는 자유와 평등에 입각하여 실현될 수 있는 가치라 주장한다.
또한 그 자유와 평등은 사회의 묵시적 계약에 의해 성립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계약의 조건은 '무지의 장막'이라고 하여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회의 평등에 관하여 계약을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불균형의 사회 보다 안정적인 평등한 사회를 원한다는 가정하에 국가가 나서서 극단의 불평등은 해소해야 할 문제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회에서 외모나 집안 또는 능력이 출중하게 태어나는 것 자체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많은 금전적 보상 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곳에 오르는 일도 그저 태어날 때 행운이 작용할 부분이지 개인의 노력 등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 역시 이 부분을 인정하나 당시 미국 사회의 정의 정립을 위해 1971년에 나온 존 롤스의 주장도 이제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기존의 사회의 평등을 위해서 국가는 도덕적, 종교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 철저한 중립에서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했지만 국가가 무조건 중립적인 위치에서 사회정의와 관련한 판단을 내릴 때 너무 많은 딜레마가 존재하기에 이제는 국가가 정제된 도덕적, 종교적 판단으로 사회정의를 위한 '텔로스' 수립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때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어떻게 보면 대립의 문제라 할 수 있는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기본 전제 실현을 위해 국가라는 최고 권력은 무조건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문제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는 상식과도 같은 것을 깨는 주장으로 마이클 샌델 교수는 낙태, 동성 결혼, 줄기세포 등과 같은 근래에 나타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과거와 같은 중립적인 관점에서 해결하기엔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고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대두될 문제이기에 보다 나은 사회정의 수립을 위한 실현의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를 현대화하여 공동선의 추구의 방향을 국가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전제는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심사숙고하여 주장할 수 있는 성숙된 민주시민 양성과 건전하면서도 발전적인 토론문화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며 성숙된 민주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국가의 공동선을 공개토론을 통해 설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국가라는 공동체가 나아갈 때 국민 개개인이 만족할 수 있는 사회 아니 미국을 만들 수 있다고 마이클 샌델 교수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끝을 맺는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개인을 공동체의 서사를 가진 존재로 주장하는데 개인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역사적 사명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으로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의 주요 논지는 미국적인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공동선을 추구하여 미국적인 사회정의를 실현하자는 주장이다.
책을 소개하는 서두에 마이클 샌델 교수라는 사람의 사상적 기반을 소개했지만 역시나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책 내용이었다. 사실 샌델 교수가 이 책에서도 소개되는 임마누엘 칸트처럼 말년에 현재의 UN 창립에 사상적 기반이 되는 '영구평화론'을 주장하여 전세계적인 정의 확립을 논한다고 한다면 그를 정치철학자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운동자로 소개하고 이미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국가가 정제된 도덕적, 종교적 입장으로 올바른 공동선을 제시할 능력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다.
먼 과거가 아니더라도 군인 출신 대통령이 아니라는 의미의 문민정부 김영삼 정권부터 시작하여 이전 박근혜 정부까지 본인 또는 아들,형제등 가족이 감옥에 가지 않은 대통령 조차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있을 않을까 싶지만 그의 형 노건평씨가 여러 이권에 개입하다 2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도 박연차 게이트 사건의 본격적 수사를 앞두고 자살을 하여 구속이 안되었을 뿐이었다.
현재의 정권 역시 내로남불식의 자세를 일관하고 있기에 정치권에서 정제된 공동선을 제시할 수준이 되는지 심히 의문스럽다.
경제권에서도 건전한 기업문화가 조성되어야 함에도 내가 아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기업의 오너나 경영자들은 여지없지 경제사범 전과자 출신으로 국가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정의에 과연 관심조차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우리의 현실이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이제 한숨 돌리고 사회정의에 대해 막 생각을 하는 즈음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최고의 엘리트 육상 선수를 교육하는 코치를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소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새로운 시도가 있는 책이 아닌 사회정의에 대해 전 국민이 이제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입문서가 필요한 우리가 아닌가 생각하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