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 19편은 달생(達生)이다.
통할 달(達)에 날 생(生)를 쓰니 잘 사는 법이나 삶이 형통하는 방법 정도로 의역할 수 있겠다.
장자라는 텍스트가 어지럽던 시절 외부의 자극이나 힘에 의하여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주어진 인간의 삶 자체를 자연 안에서 무리 없이 영위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쓰였기에 달생편은 장자의 주제에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그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다른 편에서 나오는 것들과 그 속내가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달생편 1장 시작부터 어떻게 삶을 살아야 무탈하게 살수 있는지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간단히 살펴보자.
생명의 실상에 통달한 사람은 생명의 유지의 불필요한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운명의 실상에 통달한 사람은 지식으로써 어떻게 할 없는 것에 대해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
몸을 보양하는 데는 반드시 먼저 물질적인 것으로 보양해야 하지만, 물질이 넉넉해도 보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먼저 몸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몸을 잃지 않았는데도 생명이 없는 자가 있는 것 같다.
장자 19편 달생 1장 中
더도 덜도 말고 무위(無爲)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람이 자신을 잘 보존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몸의 보존이라는 유물론적 관점에서의 보신뿐만 아니라 정신의 건강한 보존을 강조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유물론적 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로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우리 인간은 진정한 무위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 입각한 교부철학의 영향으로 육신의 보존보다 신(神)에 대한 믿음과 찬양으로 정신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형이상적 삶을 최고의 선(善)으로 추앙했으나 근. 현대 계몽주의의 영향하에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이야기했으나 장자는 이미 2,000년 이상의 시절에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스포츠 브랜드 광고와도 같은 육체와 정신의 선(善) 한 합일(合一)을 통한 행복 추구를 이야기했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기왓장을 걸고 내기를 하는 사람은 잘 하지만, 띠쇠를 걸고 내기를 하는 사람은 겁을 내고,
황금을 걸고 내기를 하는 사람은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솜씨는 한 가지일지라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인데, 즉 외물을 중시하는 것이다.
대게 외물을 중시하면 내면이 치졸해진다.
장자 19편 달생 4장 中
4장에서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물질적으로 몸을 보양하기에 충분히 가능한 상황 요즘 말로 쉽게 풀면 먹고살 만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잃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는데 이를 공자와 안회의 대화로 풀어내고 있다. 무엇인가를 통달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제자 안회의 질문에 공자는 온 갖 것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더라도 그런 것들은 그들의 마음속까지 들어가지 못하니 무슨 일을 만나든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다고 하며 설명하는 부분이다.
맥락을 보지 않고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단순히 욕망을 제어하는 금욕으로 삶의 불행을 제어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조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삶이라는 자연 속에서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변하는 육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이 그 자연 안에서 무위로 살아가는 모습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대목인 것이다.
인위적인 것을 배격하고 무위로 삶을 일관할 때 흔들리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육체와 정신을 온전히 보전한 채 천수를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8장에서는 그 유명한 기성자의 싸움닭 이야기인 목계(木鷄)를 만날 수 있다.
사실 싸움닭 이야기는 같은 노장사상 계열인 열자 황제 편에서도 만나 볼 수 있는데 장자 달생이나 열자 황제나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싸움닭이 어떻게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온전히 하지 못하고 결국엔 아무 소용 없는 인위의 마음으로 소모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이를 인간의 삶에 덧대어 봄으로서 달생 즉 삶을 무탈하게 잘 영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각성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싸움닭은 원래 그저 한 마리의 닭으로 세상에 나왔으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싸움닭으로 길들어져 처음엔 본인 스스로의 허세와 교만으로 무너지며, 두 번째는 외부에 대한 단순한 반응으로, 세 번째는 증오라는 감정이 이입된 반응으로 무너질 것이 뻔하였다. 하지만 달생을 아는 기성자는 닭에게서 그런 인위를 몰아내고 궁극엔 닭이 무위에 경지에 도달하게 하여 내. 외부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제거함으로써 그 누구도 싸울 기세를 갖지 못하는 하는 반열에 올라 마치 나무닭 같은 모습으로 그저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이런 무위에 경지라야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간사할 수 있다고 장자와 열자는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 13장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는 텍스트이지만 무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그리고 장자 1편 소요유(逍遙遊)의 첫 장의 창대한 이야기인 곤과 붕의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정리하자면 이렇다.
노나라 손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이 수양이 될 됐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신세가 한탄스러울 정도로 볼 품이 없자 그의 스승인 편경자에게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운명을 타고났는지를 물어보았다.
이에 스승 편경자는 지인(至人)의 삶을 이야기하며 손휴는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 몸의 아홉 구멍을 모두 다 간직하고 있으며, 도중에 귀가 멀거나 눈이 멀거나 절름발이가 되거나 하는 재앙을 당한 적도 없이 일반 사람 축에 들어 살고 있음에 무엇을 원망하는가 하며 돌아가게 했다.
그 후 스승인 편경자가 근심하고 있는 것을 다른 제자가 물어보자 손휴가 식견이 작은 소인인데 지인의 경지에서 답을 주어 그것에 미혹당해 삶을 더 그릇되게 살지 않을까 걱정하여 후회스럽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노나라 새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 노나라에 어떤 새 한 마리가 들어와 머물자 임금은 이를 귀하게 여겨 제사 음식과 음악을 연주하여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먹지도 노래 부르지도 않고 있다 죽었다고 한다.
새는 새로서 호수에 미꾸라지를 잡아먹고 들판에서 쉬게 해주어야 함에도 인간의 기준으로 대접하니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말이 끄는 수레에 생쥐를 태우려는 것과 같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노자 1장의 대곤과 대붕의 이야기가 곧바로 떠오른다.
곤이나 붕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큰 포부를 가지고 사는 장자의 삶을 그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는 작은 새나 연못에 사는 물고기가 어찌 알겠느냐의 다른 제자백가들과의 차별화 텍스트로 이해한다.
하지만 곤이든 붕이든 또는 작은 새이든 물고기든 자신의 인식 안에서 무위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자연 속에서 그저 주어진 삶을 잘 영위하는 무위의 삶을 지향하는 장자가 자신을 대붕이나 대곤에 비유하는 것은 자가당착적 오류이다. 장자는 그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자연의 조건하에 주어진 것에 만족할 것을 이야기한다.
같은 장에서 쓸모없는 나무이기에 잘려지지 않고 커서 더운 여름날 쉴 수 있는 그늘을 주는 나무 이야기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이야기도 달생 즉 삶을 잘 영위하는 법은 그저 태어난 대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무위로 일관하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장자적 행복론의 주요 요점을 다시금 주지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는 새이기에 들판에서 쉬고 미꾸라지를 먹어야 행복하듯이 타인의 관점에서 나에 대한 잣대를 세워 가당치도 않은 궁궐 생활을 꿈꾸며 괴로워하지 않은지 장자의 달생편을 되새겨 보니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금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저 먼 옛날 중국에서 어지럽던 시절을 살았던 장자가 지금의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장자 19편 달생(達生)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