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라는 개념은 유대계 독일 사상가로 비극적 삶을 살았던 발터 벤야민이 도입한 것이다.
예술 특히, 연극이나 오페라처럼 무대에 서서 관객 앞에서 연기하는 연기자가 바로 그 공간과 시간에서 극중 인물의 카타르시스성과 배우의 탁월한 연기를 통해서 전해지는 일회적인 마성에 대한 이끌림과도 같은 감정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예술 작품이 신을 예배하고 숭배하는 제의와 의식의 전통에서 유래했다는 벤야민의 주장에 근거한다.
벤야민의 주요 저서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아우라란 시간과 공간으로 짠 특이한 직물이다. 아주 가깝게 있어도 그 너머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의 일회적 현상이다. 어떤 여름날 오수를 즐길 때 그늘을 만들어주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말이다. 사물을 자신에게 가깝게 가져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큰 관심사이며, 일회성을 복제를 통해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증가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지각의 매체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아우라의 붕괴로 파악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中
물론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아우라'라는 소설의 의미를 단 번에 이해시켜 줄 만큼의 직접적인 예는 아니지만 이를 통한 유추를 통해 조금은 쉽고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기에 조금 무리가 가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아우라'라는 개념을 들며 소개하고자 하는 개념은 자본주의사회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통해 자본 그 자신의 세력 확대에만 골몰하던 시기 예술 또한 사진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대량 복제되는 당시의 예술작품에 비하여 과거의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의 붕괴를 개탄하며 도입된 개념이지만 이 개념 자체를 확대 해석해 본다면 현대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욕망과 그로 인한 삶 본연의 모습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여기지가 있기에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소설 '아우라'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환기하며 우리에게 각성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생각으로 적어본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결국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한계를 향해 나아가는 육체. 그런 육체는 단 0.0001초의 찰나의 순간에도 변화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늙고 병들어 사라질 운명의 육체. 그런 육체에 갇힌 정신은-유물론적 관점- 관념적 욕망을 만들어내는데 그건 바로 자신의 최고의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나약함 그 자체에 대한 명확한 증거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 보편적 욕망의 한계와 허망함을 마술적 사실주의로 표현 것이 소설 '아우라'라고 한다면 '아우라'의 원 개념에서도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찰나라는 시간적 그리고 공연장이라는 공간적 한계 여기에 더 해 그 당시 그 배우가 연기한 그 배역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의 한계 명확한 그 '아우라'를 소유하고자 기술 시대 복제품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인간의 욕망에 기댄 그 덧없는 행위에 대하여 고발한 발터 벤야민의 철학을 상기해 본다면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문학작품과의 접점이 어느 정도 형상화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1928년 파나마의 파나마시티에서 멕시코 출신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난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멕시코 출신답지 않게 무척이나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성장하였다.
특히, 청소년기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멕시코의 모국어인 스페인어 실력이 늘지 않자 그의 아버지가 집에서는 스페인어만 쓰도록 교육했다고 하며 대학은 멕시코로 돌아와서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이후 제네바 등지에서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닦고 작가로 데뷔했으며, 현재는 옥타비오 파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함께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 성과뿐만 아니라 프랑스 주재 멕시코 대사, 국제노동기구 멕시코 대표, 멕시코 문화부 관리 등 관직에서도 두각을 내어 그의 문학작품들은 앙가주망적 내용이 많으며 '아우라'번역본에 실린 '나 자신을 읽고 쓰기에 관하여- (나는 아우라를 어떻게 썼는가)'에서도 언급하듯이 스페인 출신의 영화감독 '루이스 브뉘엘'(그 유명한 마드리드 대학의 위대한 3인방 중 하나로 문학에 로르카, 회화의 살바도르 달리, 그리고 영화의 루이스 브늬엘은 지금도 전설 그 자체로 회자된다) 과의 교류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문학작품에서는 다분히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 존재하며 그 대표작이 '아우라'이다.(우리는 이를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하며 그 대표작으로는 '백년의 고독'으로 유명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있다)
또한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마르크스주의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나중에 살펴볼 내용에도 다분히 유물론적 시각으로 인간의 욕망을 추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서두가 길었던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먼저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젊고 재능 있는 역사학도 펠리페 그는 어느 날 신문광고에서 월 4,000페소의 일자리 광고를 보게 된다. 현재 하고 있는 보조교사의 월급 900페소보다 훨씬 많은 금액으로 한 석 달만 일한다면 일 년간 원하는 역사 학도로서의 작업을 돈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겠다는 요량으로 구시가지의 다 무너져가는 대저택으로 향한다.
그곳에서는 100살이 족히 넘은 콘수엘로 부인이 자신의 죽은 남편인 요란테 장군의 비망록을 정리하는 일을 제안한다. 모든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월 4,000페소라는 거금에 그 일을 수락하고 앞으로 비망록이 정리될 때까지 그 저택에 머무는 조건도 받아들이게 된다.
아무것도 흥미로울 것 없는 무너져 가는 저택에서 오로지 아우라라는 콘수엘로 부인의 조카로 젊고 녹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여인만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콘수엘로 부인과 행동이 겹치며 이상하리만큼 나이 먹은 콘수엘로 부인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그녀를 그곳에서 구출하여 멀리 도망가서 살고자 하나 아우라는 이조차 거절한다.
하지만 이미 아우라에게 사랑을 맹약하고 그의 육체에 빠진 펠리페는 점차 자신도 모를 오싹함에 빠지고 마는데 이는 아우와 콘수엘로가 서로를 겹쳐가며 등장하는 것인데 이내 자신이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이 콘수엘로였으며 자신은 그 콘수엘로가 욕망으로 맺은 요란테장군의 환영임을 알아차리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사실 소설이랄 것도 없는 아주 적은 분량의 상징적인 단편 소설이다.
그 플롯의 재미보다는 앞부분에서 살펴본 대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기법을 도입하여 인간의 욕망을 재조명하는 것에 의의를 둔 작품이기에 줄거리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소설은 100살이 넘은 콘수엘로 부인이 젊은 날 자신과 요란테장군의 아름다운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는 욕망을 2인칭 화자를 등장시켜 현실과는 동떨어진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전개시킨다.
마치 영화 '식스센스'에서 죽음이라는 현실을 망각한 죽은 사람의 유령이었던 아동 심리학자 말콤 크로의 반전처럼 생생히 살아 무수히 많은 심적 변화를 느끼는 펠리페는 결국 콘수엘로 부인의 욕망에서 새로 탄생한 젊은 요란테 장군의 환영이었던 것이었다.
콘수엘로 부인은 죽음이라는 실존적 한계가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장 아름답던 시절 그가 지냈던 요란테 장군보다 휠씬 젊은 그를 그녀의 욕망 속에서 부활시켜 아우라와 펠리페라는 환영으로 사랑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 아름답던 찰나의 순간. 그 순간으로 영원히 젊은 사랑을 하고픈 욕망. 이것을 부인하려 해도 잠자는 순간의 꿈이나 무의적인 상상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욕망하고 있을 것이다.
꼭 이런 젊은 사랑이 아니어도 우리는 자크 라캉의 말대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고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딱히 이론적으로 완벽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영원한 시간 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영적인 존재가 아닌 이 지구상에 이미 존재했던 어느 물질의 우연의 집합으로 인해 생긴 육체에 기인하여 사고하는 존재라는 유물론적 논리로 접근한다면 한낱 환영에 불과한 관념적 욕망에 사로잡혀 몸과 마음을 스스로 괴롭히는 존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죽하면 부처님이 그 많은 고행과 명상을 통한 수행을 통해 깨달은 것이 욕망의 제어 또한 제거를 통한 해탈이 아니었던가?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욕망 그 욕망 안에서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한계가 다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욕망을 꿈꾸는 우리 인간 그런 우리 모두에게 꿈에서 깨어 현실 속에서 소박하지만 조화로운 삶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도 말하듯 인간 실존의 본래적 존재로 돌아가 죽음을 초월한 삶의 초석을 다지기를 바라는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에 대하여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