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종이가 검은 반도체가 되기까지
일본 사가현 아리아케 해는 일본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김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한국에서도 이 지역의 김을 수입하여 고급 스시야에서 많이 사용하곤 합니다. 일본경제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김 가격은 수온 상승으로 인해 적조 등의 이상현상이 발생하면서 최근 2년 사이에 약 2배가 상승했습니다. 수온 상승으로 김의 원재료인 원초가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고, 원초가 황색으로 변하는 황백화 현상으로 인해 2022년 기준 일본 내 김 생산량은 51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한국 또한 가격이 오른 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유가 조금 다릅니다. 우선 올해 일본과 중국에서 김의 원재료인 원초 작황이 부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규모로 김을 양식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중국 이렇게 세 나라뿐인데, 김 양식장을 확대한 덕분에 수온 상승으로 인한 생산량 저하를 최소화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은 소폭 원초 생산량이 증가했습니다. 또한 글로벌 시장에서의 김 수요가 확대된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전 세계 김 생산의 약 70%를 차지하는 한국은 김 가격의 상승과 수요 확대로 인해 한국 수산식품 최초로 수출액 1조 원(약 1,136억 엔)을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김을 ‘검은 반도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한국 김의 현재 수출 성장세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50년이 넘도록 부동의 수산물 수출 1위였던 참치마저 넘어섰습니다. 이에 따라 관련 기업들의 주가도 껑충 뛰며 5월 초 관련 보도 이후 1달 사이에 주가가 50~100%가량 올랐습니다.
지금처럼 김이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친환경적이라는 이미지를 얻은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2021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한국의 김 양식장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하며, ‘해조류 양식은 비료나 담수 등의 수자원이 필요 없고 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에 매우 친환경적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해양 식물이 육상 식물보다 탄소 흡수 속도가 50배가량 더 빠르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로 김은 친환경적인 식재료입니다. 이에 세계자연기금(WWF), 세계은행(WB)을 비롯한 글로벌 환경 NGO 단체들이 한국의 김 양식장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김이 글로벌 시장에서 스낵처럼 인식되어 소비되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김을 식재료로 각각 조미김이나 김자반으로, 후리가케와 노리츠쿠다니를 밥과 함께 먹는 반면에, 미국을 비롯한 서양권에서는 바삭함과 감칠맛으로 인해 스낵처럼 소비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건강식 열풍이 불면서 김에 요오드와 섬유질, 단백질이 많다는 것이 서양에 알려지고, 유당이나 글루텐 프리, 동물성 단백질 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베지테리언이나 글루텐 프리 식단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대체 영양식품으로 인식되며 김의 수요가 증가했습니다.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김은 한국에서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 주로 생산되곤 합니다. 식품 대기업의 이름을 단 김 제품도 제조사를 살펴보면 중소기업(혹은 중견기업)인 경우가 많습니다. 주로 현지에서 양식장을 운영하는 어민들이 기업 설립에 일부 참여하거나 직접 조합을 통해 기업을 설립하여 직접 판매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김의 양식부터 가공까지 제품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한 기업에서 전담합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유명한 김 브랜드는 대부분 대기업 제품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스마트팜 등 1차 산업에 스타트업들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투자와 관심이 부족합니다. 특히 김 양식 같은 해양수산업의 경우 대규모 인프라가 동반되어야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타트업들이 진입하기가 어려운 시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투자에 관심이 있는 글로벌 사모펀드도 스타트업이 아닌 주요 김 생산 기업에 투자하여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진입 장벽이 높을수록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는 스타트업이라면 도전하고 싶은 그런 블루오션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 김 양식 산업의 혁신을 위해 도전장을 던진 기업이 있습니다. 스마트 수산양식 기술 스타트업인 ‘슈니테크’입니다. 올해 4월, 창업 1년 만에 해당 제품으로 2억 원 규모의 시드 투자를 유치하고 최근에는 지역 내 기업들의 혁신성장을 돕는 창조경제혁신센터의 기술창업 지원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김 양식 초기에 원초 배양을 위해서는 굴의 껍데기(패각)를 활용하는데, 자연물이기 때문에 모양이 제각각이거나 품질이 고르지 못하고 무거운 무게로 인한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 종자를 배양하는 전용 필름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수산물 양식업과 관련한 다양한 기술 개발을 시도하여 앞으로가 기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해초(Seaweed)가 아닌 해양 채소(Sea Vegetable)
독일의 한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동아시아인(한국, 일본, 중국)들만이 김이나 다시마 같은 해조류를 분해할 수 있는 장내 세균을 갖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만큼 김과 같은 해조류를 많이 먹어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수천 년 전부터 해조류를 섭취했던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자연스레 김을 많이 먹는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현재 대규모 김 양식이 가능한 국가도 한국과 일본, 중국뿐이죠.
글로벌 리서치 기관 ‘Zion Market’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글로벌 김 시장 규모는 약 16억 2천만 달러로, 2028년에는 28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을 전망했습니다. 과거 서양에서는 김을 ‘검은 종이’라고 부르며 혐오 식품 취급을 받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해조류가 바다의 채소처럼 영양 스낵으로 인정받으며 한국의 대표 수출품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현재 대규모로 김 양식이 가능한 국가는 한국과 일본, 중국 정도뿐이기 때문에, 글로벌 시장에서의 김의 인기는 양국에 전부 이득이 되는 글로벌 트렌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한국에서 해양수산업 분야에서 지속가능성과 스타트업의 진입이 이야기된 것은 채 10년도 되지 않습니다. 또한 최근 들어 수입 수산물과 관련한 기업별 데이터 플랫폼이 한 스타트업을 통해 공개되었을 만큼 국내 해양수산업은 아직 다른 산업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고 변화의 속도도 느린 편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디지털 전환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그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는 산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해양수산업 관련 스타트업의 등장을 주시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