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포장하는 아이러니
어느 날 우연히 연속 재생되던 유튜브 영상에서는
가수 성시경이 본인 목소리가 너무나 낯간지럽다며 노래를 끝까지 듣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일상 속 BGM처럼 틀어놓은 영상에서 나오는 예상치 못한 소리에 내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하던 일은 잠시 멈추고 한 쪽에 세워둔 휴대폰에 손을 댔다. 화면 좌측을 따-닥 두 번 연속 누르며 15초 전으로 돌아갔다. 이성으로서의 매력보단 내 곁을 지켜온 친근한 삼촌 같은 존재이지만, 감미로운 목소리로 “잘 자요.”하는 라디오 마무리 멘트가 무릇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는가. 우리나라 대표 발라드 가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만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시경 노래만큼은 이번 생에 꼭 콘서트장에서 라이브로 들어보리라 다짐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간질간질한 특유의 톤과 이상적인 교회오빠를 떠올리게 하는 다정함은 ‘좋은’ 목소리의 표본이었다. 데뷔 10년이 넘은 긴 세월 동안 그의 노래는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되기도, 어필용 노래가 되기도 했다. 음역대가 낮던 높던 모두에게 사랑받아온 그의 목소리를 왜 본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까.
때로 사람들은 본인이 본인을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본인이야말로 본인을 제일 모르는 사람일 때가 많다. 일부분에 있어서는 정답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에 확신하며 맹신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성시경 씨가 본인이 상상하고 있던 목소리와 실제 목소리에서 느끼는 괴리에 몸 둘 바 모르는 것처럼. 사람들은 스스로의 민낯을 마주할 때 놀라움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실재에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자기 방어적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부모는 사실 부모 본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자녀에게 행한 폭행을 ‘사랑의 매’로 포장하는 행위라고 본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린 시절 90년대 중후반 ~ 2000년대 초반 일일연속극과 주말드라마에서는 이런 장면들이 곧잘 나오곤 했다.
회초리로 자녀에게 “잘못했어, 안 했어?!” 질문인지 호통인지 모를 소리를 연신 지른 후, 걷힌 다리에 세차게 회초리를 내리친다. 새벽밤, 이불속에 파묻힌 자녀에게 슬그머니 찾아가 눈물을 훔치며 피떡진 종아리에 후시딘을 발라준다.
미디어 속 이 파괴적인 장면은 우리 부모에게 주기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했다. 드라마 장면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신념으로 체벌을 자행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그런 본인들의 선의에 찬 모습과 마음을 자녀가 알아주지 못하는 것은 응당 자녀의 무지와 경험의 부재 때문이라 느꼈다.
하지만 자녀의 입장에서 보는 현실 장면은 드라마와 사뭇 달랐다. 부모의 의도가 어찌 됐건 그건 모른다. 생존을 위해 바닥에 납작 기는 경악스러운 시간일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