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애착형성
귀하다,라는 세 글자면 되었다.
고심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넘치는 시간과 에너지로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기도하다가. 임신을 위해 백수가 되었으나 난자와 정자의 수정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인정하니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고백하게 된 것이다. 손과 발이 되는 통로는 여러 가지 있었다. 남편 목사님을 따라 지방까지 심방을 다녀오는 일, 교사가 부족하다는 부서에 지원하여 섬기는 일, 그리고 영어 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나의 재능과 경력을 사용하는 일.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의 필요는 임신에 있었지, 섬김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먹잇감을 찾아 전속력으로 달리는 치타처럼, 자연스레 온 힘 다해 다음 목표를 향했다. 그러나 기도하던 중 결혼 전에 고백했던 말이 떠올랐다. 결혼해서 여유가 생기면 온전히 주를 섬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늘 주를 섬기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곤 했구나. 대학을 가면, 직장에 가서,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으면. 하나님, 저의 삶에 어느 정도 이룰 것을 다 이루면 제가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몰랐으면 계속 그렇게 미루며 살았겠지만 깨달았으니 돌이켜야 했다. 임신을 위한 노력을 내려놓는 일이 너무나 바보같이 느껴졌으나, 이제는 결단해야 했다. 시간과 돈과 힘을 들여 하나님의 마음이 향하시는 이웃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단했음에도 몇 번을 망설이며 미루기를 반복했다. 과연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을, 어쩌면 내가 가진 것을 더 내놓아야 하는 이 일을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안고 기도하며 한 발 두 발 떼었다.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평안함과 기쁨 그리고 열정을 부어주시며 그다음 발자국을 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러니 참 귀한 일이었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이 대단하신 것이었다. 귀하고 대단한 일임에도 선한 일에 열심을 품으라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이 길은 정말 안개가 가득 깔린 도로를 거북이처럼 느리게 운전해 가는 기분이었다. 분명 기도했고, 말씀을 받았음에도 현실을 바라보면 불확실함과 의심이 가득 차는 길이었다.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걸을 수 있는 물 위였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이 아닌 찰박이는 물결에 휩쓸리기 십상이었다.
발을 디뎠으니 빠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물결을 잡으려 했나 보다. 잘 걷고 있어,라는 위로의 말, 응원의 말, 격려의 말 같은 것들.
은사 목사님의 두 아이들을 먼저 가르치기로 했을 때 들려온 첫마디가 귀하다, 였다. 은사 목사님을 내가 괜히 인생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그간 기도의 과정을 굳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셨을 거다. 얘가 그럴 애가 아닌데, 그런 헌신으로 섬겨준다니 귀하다 하셨을 거고. 그것이 당연하게 되는 일이 아님을 알아봐 주셨기에 툭 튀어나온 말일테다.
그 한 번으로 족했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부모님께 넌지시 말씀드렸다. 목사님의 두 아이들 영어를 가르쳐주기로 했노라고. 밥 먹던 테이블에서 즉각 칭찬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사실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지금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드리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별 다른 반응이 없어도 괜찮았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다음날,
아버지는 내게 화가 난 목소리로 굳이 그 일을 왜 하려느냐 언성을 높이셨다.
작게라도 아이들을 모아 공부방 같은 것을 하면 돈을 좀 벌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굳이 그 목사님 아이들 과외를 해주어야겠냐, 그 일을 시작하면 너 덧가지의 책임이 따라온다는, 아무리 들어도 요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던 아버지의 화난 말투. 결국에는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이라면 관두라는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불안하신 게 있으시냐, 뭐가 염려시냐, 혹시 지금 화내시는 거냐,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했지만
이미 나도 감정이 상한 터라 고운 말씨와 말투는 저 멀리 던져버리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마음만 상했고 대화가 통하지 않은 채로 끝났다. 감사히도 옆에 있던 남편이 통역을 해주었으나, 아버지의 의도와 마음을 듣고 난 후에도 어딘가 멍하니 마음이 고장 난 듯했다.
아버지가 반대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아. 그간 충분히 기도하며 결정한 일이야. 아버지의 허락이나 강요는 내게 필요치 않아. 아버지의 마음은 알겠어. 아버지의 입장이면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
정말이었다. 대체 왜 그러시냐 불 같은 분노가 일지 않았다. 남편으로부터 들었던 아버지의 의도는 이해할 만했고, 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럴 수 있다 여겨졌다.
그러니 괜찮아야 했다. 나는 이제 아버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을 했으니, 더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성장했으니. 이런 대화에도 타격감 없이 이제는 무뎌질 때가 되었으니.
처음 세네 시간은 조용했다. 고요할 뿐이었다. 아버지를 이해해 버린 이상 내게는 화가 날 건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기분은 뭘까.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끝내주는 저녁을 차려냈음에도 나는 자꾸 밑으로 가라앉았다. 시야가 흐려지며 힘이 없어지고 의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털어놓으며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이런저런 마음의 생각을 흩뿌렸다.
내 마음이 슬픈 이유는 아팠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아버지와 거리를 두어도 나는 결국 제자리인 것이 슬펐다.
아버지의 본심은 그렇지 않음을 알았으나 난데없이 날아든 돌에 온몸을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부녀가 실상은 서로를 위하고 있음에도 서로를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임에도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이니 앞으로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될 것만 같아 숨이 막혔다.
아빠는 고심 끝에 돌을 던지고, 나는 급작스럽게 돌을 맞고, 그러나 아빠는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 하고,
그 마음을 이해한 나는 아빠에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고, 아파서 누워있다가 괜찮아지면 또 돌이 날아온다.
애써 아물게 두었던 상처에 다시 생채기가 나자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이제 괜찮아, 하고 또 눈물이 나더니 그래 그러면 되겠다, 하고 웃었다가 다시 눈물이 흘렀다.
엄마와 동생에게 힘들다고 하면 흘려보내라고만 한다.
아프게 한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친 사람에게 상처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당사자인 내가 해결해야 끝날 문제인데, 그럴 용기와 배짱이 없는 나는 한없이 구원자를 기다린다. 엄마가 나를 구원해 주기를, 남동생이 날 위해 맞서주기를. 깊게 패인 상처가 두 배 세배로 욱신거린다.
그러다 다시 내게 문제를 찾는다.
내가 마음이 연약해서. 내가 흘려보내지 못해서. 내가 아빠를 용서하지 못해서. 내가 사람은 바뀔 거라고 기대해서. 내가 애초에 과외하겠다는 말을 꺼내서. 내가 자꾸 바래서.
원인을 찾으면 끝날 문제인 것처럼, 울면서도 계속 원인을 찾는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글을 쓰는데,
누워있으면 온갖 나쁜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야 끝날 것만 같다.
내가 암이라도 걸려야 아빠가 내게 더는 소리를 치지 않을 것만 같다.
잘난 척하는 딸이 병에 걸리고 아파야만 그제야 아빠는 위로해 주며 내 편이 되어줄 것만 같다.
아빠는 늘 나를 반대로 대하니까. 잘하면 질책하고, 자책하면 지켜 세워주니까.
아버지를 버리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내가 나를 버리는 무서운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버지가 바뀌기를 기대한다.
이것을 나는 우울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남편과 결혼해서 잠시 멀리했던 병인데, 순식간에 이 우울이 나를 잠식한다.
우울이 깊어지면 하나님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자기 연민에 깊게 빠지고, 이미 무기력한 나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밤이 찾아온다.
우울이 차올라 숨을 못 쉬겠으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쳤다가 다시 우울로 빠지고
그러다 다시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생각한다. 이 못되고 간사한 마귀자식아! 하나님은 나를 네게 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이럴 때는 하나님께 SOS 해놓은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그럼에도 우울은 단번에 가시지 않는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고,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
나의 깊은 곳을 헤치고 또 헤치는 과정을 반복한다.
깊은 밤을 눈물로 적시다가 불현듯 남편이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부모님에게 마냥 잘했다는 칭찬을 바라는 게 아니라고.
단순한 칭찬의 차원이 아닌, 내가 걸어가는 모든 길에 응원과 공감과 격려를 바라는 거라고.
인정 욕구가 크다는 생각은 줄곧 해왔는데 그 실체는 잘 몰랐었다. 단순하게 칭찬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공감과 격려가 바로 내가 부모님께 원했던 인정의 결이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먹은 모든 과정을 들어주고 알아주며 공감함으로 곁에 든든히
서주는 것이 내가 바라는 참된 부모님의 역할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고수해 온 부모의 역할과는 정반대로구나. 아버지는 딸의 인생에 감독자로 서 있는 것이 최선의 사랑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내가 생각한 것을 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내가 마음먹었을 때 어떤 일이 잘못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계산해서 탁탁 제시하는 일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라 여기셨으니 그리 하셨겠지.
그래서 내가 인스타그램에 중독되었구나.
아버지 곁에서의 나는 늘 틀리고 잘못한 못난 사람이지만,
SNS 상에서의 나는 늘 옳고 잘하고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
그곳에는 내게 하트를 눌러주며 나의 인생을 지지해 주는 격려자들밖에는 없으니까.
식사 준비한 사진, 러닝하고 느낀 점을 올린 글, 남편과 데이트 한 영상, 말씀 읽고 감동이 된 성경 구절들. 내 삶의 한 부분 부분을 실시간으로 업로드 할 때마다, 오구 그랬구나 공감해 주고 인정해 주는, 클릭 하나면 가능한 따뜻한 격려들. 보잘것없는 나를 살게 하는 동력이 바로 거기에 있었구나.
유아서적이었나. 따뜻한 온기는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하다더라.
아버지에게 느끼지 못한 온기를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브런치에서, 카카오톡에서 찾고 있었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끊임없이 스크린을 들여다보며 쉴 새 없이 스크롤을 내렸던 이유는 바로 그곳에 나의 애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 격려해 주는 수많은 이를 만날 수 있는 곳. 나를 살게 하는 핸드폰. SNS의 습관은 아버지를 대할 때도 그대로 흘러갔던 것 같다. 사진 한 장만 올리면 무수히 많은 하트를 받듯이, 말하면 인정해 주고, 말하면 공감해 주는 즉각적인 리액션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요구하지는 않았나.
애정 결핍인 것은 진작 알았지만 남편과 함께 할 때는 멀쩡히 잘 살길래 다 치유된 줄로만 알았다.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시간이 그렇게 지루하고 불안하더라니. 올빼미족이 되어 밤늦게부터 새벽까지 사부작 대며 그제야 이것저것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남편의 존재가 퇴근 후에 함께 있어주어 그랬던 거구나.
내가 그랬구나.
내가 힘든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따끔따끔 불주사를 맞은 것 같이
정말 너무나도 아팠는데,
끙끙 앓는 통에 제가 꼭 알았어야 할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악한 의도로 그를 애굽의 노예로 팔았음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계략을 선한 계획으로 바꾸시어 요셉을 향해 큰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
아버지의 연약하고 서투른 사랑을 하나님은 선한 방법으로 바꾸시어
죽어가는, 죽기 직전인 나를 구원해 주셨다.
결국 나를 구원해 준 이는 엄마도, 남동생도, 남편도, 나 스스로도 아니었다.
다시 또, 여전히 변함없이, 이번에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편 73편 23절 말씀, 아멘.
하나님이 왜 자신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겠는가.
육신의 아버지로 충분했으면 하나님께서 왜 굳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고 하셨겠는가.
부모와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어려웠음이 서서히 생각났다.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머님과의 어려움으로, 아버지와의 괴로움으로 서서히 말라간다. 부모와의 관계를 놓고, 포기하고,
외면하고, 회피하고, 때로는 싸우다가도 어쩔 도리가 없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산다. 대처 방식과 정도가 다를 뿐. 그래서 사람들은 부모님과의 단절로 자기 자신을 지켜줄 새로운 부모를 찾아 나선다.
나를 구원해 줄, 사랑해 줄, 격려해 줄, 지지해 줄, 곁을 든든히 지켜 줄. 때로는 그것이 친구든, 남편이든, 아니면 그들로도 부족하여 온갖 SNS든. 간절히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형태로든 따스한 온기를 잠시 잠깐동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경험해 보니 알겠다.
인스타그램의 하트와는 비교도 안되게, 카톡의 반가운 1의 숫자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이 세상 끝나도록, 아니 세상의 끝 이후에도 영원토록 반갑고 좋은 분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으로 유일하시다는 것을.
내가 애착을 형성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 애착은 사진 하나에 순식간에 달리는 하트처럼 빠르고 쉽고 간단하지만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실 만큼 심오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의 사랑을 알아가게 하시는데 우리의 인생 모든 순간을 사용해 가신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루 또 하루를 하나님과의 애착으로 보내길 원하신다.
말씀으로 기도로.
나의 생명이 그곳에 있다.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다.
날 자녀 삼으시고
죽어가는 나를 오늘도 또 살리시는 구원자 하나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며,
그분 홀로 위대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