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철이 들어서 어떡해

성숙은 곧 철이 든다는 말이었다.

by 아링

오랜만에 생각난 브런치.

여전히 아이도 없고, 직업도 없고, 꿈도 없다.


무엇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는 지금 마치 힘 다 빠진 삼손 같다.


초등학생 때부터 삼손은 참 익숙한 성경 인물이었다.흑백으로 프린팅 된 성경 만화를 재밌게 보았던 터라, 만화로 묘사된 우락부락한 그의 근육질 체형과 남성미 넘치는 그의 표정, 행동들이 기억난다. 그때는 만화로 스토리만 빠삭하게 알았는데 이제야 보이는 성경 구절이 있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_사사기‬ ‭14‬:‭6‬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_사사기 14:19


삼손이 말도 안 되는 힘의 능력을 행한 흔적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가 바로 "여호와의 신" 또는 "여호와의 영"이다. 삼손은 자신의 능력인 줄, 당연한 자신의 힘인 줄 알았건만.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원수 블레셋을 무너뜨린 힘은 오직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위해 삼손에게 허락한 능력이었음을. 하지만 삼손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에게 기도하거나, 그를 찾으며 힘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모두 밀리고 두 눈이 뽑혀 적군에게 끌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까지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깨닫지도, 여호와의 영에 의지하지도 않은 것이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_사사기 16:20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인생으로 전락한 삼손. 한 올도 남지 않았던 머리가 다시 자랄 정도의 시간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었을까. 옥에 갇힌 자가 되어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으로 날들을 보냈을까. 망한 것 같은 삼손의 모습. 여호와의 영이 떠난 인생의 말로는 그가 함께 할 때의 영광과 도저히 견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삼손의 삶의 마지막 페이지가 되었을 때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는 자가 되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_사사기‬ ‭16‬:‭28


그의 간절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처절한 간구가 들린다.


매 순간이 성령의 영의 이끄심인 것을 깨닫지 못한 삼손은 자신의 힘이 다 빠져나가고서야 깨달았다.

머리카락이 밀리고, 두 눈이 뽑히고 원수의 영역에 꼼짝없이 갇힌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힘과 능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하나님의 함께하심만이 그에게 전부였다.


나야말로 삼손이 아닐까?


내 몸으로 임신 할 수 있다고, 내 능력으로 성실히 일했다고, 내 꿈으로 진로를 설정했다고 믿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임신 테스트기는 단호박 한 줄이었고, 뛰어나고 특출 났던 내 능력은 사실 별 것 아니었다.

분명하다 믿었던 나의 진로도 지금은 언제 그런 꿈을 꾸었는지가 무색하리만큼, 텅텅 빈 백지가 되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온 것, 재능을 살려 대학을 가고, 그토록 원하던 캐나다를 다녀온 것,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남편을 만나 사랑 할 수 있는 것.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그의 영을 부으셨듯, 내 삶의 굽이 굽이 지나온 모든 길목마다 성령님을 통해 내게 크신 은혜를 부어주신 인생이었다. 정말 유명한 찬양의 가사처럼,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붙잡을 것 하나 없는 지금에서야 절실히 느끼는 하루하루이다.


삼손의 기도가 내 귀에 들리는 것은 나 또한 그의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었다. 힘 없이 맷돌을 돌리기만 하는 인생 같은 요즘, 내가 하는 것 그 무엇이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안에 거하며 그가 허락하시는 만큼, 그의 인도를 따라 그의 능력으로 살아내는 것만이 내게 전부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도, 예수님 닮아 섬기며 살겠다고 결단하는 의지도. 회개하며 다시 일어서겠다고 하는 새로운 마음도. 모두 주가 허락하고 주의 영이 이끌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_사사기 16:30


맷돌을 돌리는 처지일지라도 내가 나를 비관하지 않음은, 내가 살아 내 능력으로 행하는 일보다 하나님께서 내 안아 살아 역사하실 때 행하시는 일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크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어떠한 결과 하나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무력하지만, 자신에게 철저히 실망하고 돌아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삼손을 다시 들어 사용하시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일을 행하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의 지금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실패는 실패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의 실패는 곧 자기 부인으로. 나의 절망은 곧 하나님 주신 소망으로.




친정에 잠깐 다녀왔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 짧은 여정이었다. 당연히 잘 된 것 같았던 부모님의 사업. 그냥 그러려니 했던 부모님의 성실과 땀방울, 자식과 가정을 향한 책임감. 응당 그래야만 했던 자식을 향한 마음과 물질.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이제 보게 되었다.


삼손에게 그랬듯이, 나에게 그랬듯이.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우리 부모님의 삶에도 언제나 함께 하셨다. 가게가 이만큼 잘되었던 것도, 아버지가 밤낮 고민하며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셨던 것도. 모두 은혜였고 모두 감사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그의 영이 부모님과 우리 가정에 거하시므로 가능한 일들이었다.


임신이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딸에게, 위로의 마음을 용돈 십만 원에 담아 엄마를 통해 건넨 아빠. 전 같았으면 사실 좋아했을 건데. 아버지스러운 행동이었음을 마땅히 여기며. 입바른 감사 합니다만 건넸을 나인데. 어쩐 일인지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십만 원이더라. 그 고생을 하고, 그 수고를 하고 산 아빠인데. 다 큰 딸이 혹여 아직도 짐이 될까 봐. 부모님이 땀 흘려 번 귀한 돈, 내가 얼마나 그동안 가볍게 여겼던가. 그저 미안하고 마음 아픈 돈이 되었다.

어쩌다 내가 철이 들었을까.


엄마는 내가 이불도 개고 청소를 싹 다 하고 갔다며 시집을 가긴 갔구나, 철이 들긴 들었구나 하신다. 마냥 사랑만 받고팠던 내가. 받아도 받아도 끝이 없어 메워지지 않던 내가. 나 밖에 모르던 내가.


어느새 갑자기 철들어버린 건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하나님 곁에 매달려 사니 나도 모른 사이 성숙을 이루어간다.

주께서 이루신 성숙이, 그가 키우신 내가 점점 철이 든다.


성숙은 곧 철이 든다는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키워가신 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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