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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Jan 23. 2021

모르겠어? 그 남자가 연락 안 하는 이유를?

정신을 놓는 순간 펼쳐지는 가상현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가장 열심히 한 건 두말할 필요 없이 미팅이다. 여대에서 미팅에 나간다는 건 단순 연애를 넘어 동기들과의 공감대 형성을 의미했다.


같은 삶에 묶여 서로를 뻔히 들여다보던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개개인으로 흩어졌다 모이는 대학에서 매번 자기소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제 그 남자 되게 웃기더라는 말로 시작해서 술에 취한 네 꼴이 더 우스웠다는 가벼운 농담을 건네기 시작하니 어느새 동기들 앞에서 내 뒷목이 빳빳이 굳는 일은 줄어들었다.


하루는 고등 동창에게 연락이 왔다. 같은 과에 키도 크고 남자다운 친구가 있는데 나랑 잘 어울릴 것 같으니 한 번 만나보라고. 얘기가 오가던 중 소개팅이 부담스럽다는 그 남자는 미팅으로 다 같이 만나 자연스레 알아가는 게 좋겠다더라. 나는 개인전에 강한 사람인데 어쩔 수 없지.


만나서 한바탕 게임을 하고 신나게 놀았지만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에라이 망했다, 깔끔한 자포자기를 선언했다. 누가 누군지 뭐가 어딨는지 모르겠는 왁자지껄 요란한 분위기는 그의 눈에 비치는 나를 빛나게 만들리 없었다. 몸동작 크게 나서지도, 혼자 동떨어진 구석에 앉아 울상 짓는 것도 아닌 그런 적당한 중간 페이스로 미팅을 마치고 말 몇 마디 못해본 아쉬움 잔뜩 챙겨 또각또각 건물 밖 지상으로 올라갔다.


온통 새까만 거리를 배경으로 그는 큰 키를 매력 삼아 반짝이듯 서 있었다. 주머니에 두 손 넣고 일행을 기다리는 그의 곁으로 은근슬쩍 다가갔다. 내내 옆자리에 붙어 앉았어도 진짜 타이밍은 지금이다 싶었다. 많이 춥지 않냐 물었던가 나의 첫마디는.


그의 얼굴에 친절함이 수채화 물감에 물을 섞은 듯 은은히 번져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 힘들지 않았냐며 다정스레 챙겨주는 모습에 꼬이던 혀에 힘이 들어갔다. 행여 내가 신은 하이힐에 발 헛디딜까 조심스레 잡아주는 제스처로 에스코트해주는 것도, 얼마 전 미팅을 주선하느라 연락을 주고받은 번호가 내 번호가 맞는지를 재차 확인해 묻는 그의 질문까지도 모두 다 나에겐 그린라이트였다. 한 번 따로 만나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높은 구두를 신고 걷는 건 하나도 힘에 부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그날 밤늦게도, 그다음 아침이 밝아서도 그에게 연락 오는 날은 없었다. 머리를 쥐어 싸매고 이게 뭐지 하는 내게 친구는 배꼽을 쥐어잡는 웃음으로 말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모르겠어?


너 같은 바보 천치는 또 처음 본다는 친구의 표정이 컴퓨터 화면을 타고 넘어와 내 눈 앞에 아른거렸다.

현실 자각 타임이구나. 그래 그런 거겠지? 친구에게 대충 답장하고 채팅창 상단에 있는 엑스를 있는 힘껏 광클.


한 번 호감이 생기면 그 감정은 나만의 대체현실을 창조해낸다. 눈 앞에 드러난 명백한 결론에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순전히 내 입맛에 맞추어 골라낸 정황들을 화려하게 버무려 나만 먹을 수 있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으로 한 접시 푸짐하게 담아낸다.


그가 내게 버저를 눌러 보였던 그린라이트에도 불구하고 잘 들어갔냐는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은 구체적인 이유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고서야 알 길이 없을 거다. 어느 정도 짐작만 가능할 뿐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른 게 사람이니 그 많은 변수를 무슨 수로 하나하나 밝혀 낼 수 있을까. 감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는 내게 연락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만큼의 아쉬움은 없다는 것이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는 황홀한 기대감이 무너지고 부정할 수 없이 현란했던 그린라이트는 기계적으로 번쩍인 신호등 색과 같은 멋없는 초록색이었을 뿐임이 인식되는 순간에 가상현실은 사라지고 진짜 현실에 덩그러니 거절당한 내가 남는다.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던 명확한 팩트가 폭탄처럼 여기저기에서 터지기 시작한다. 그제야 이래서 아니구나, 저것도 아니었구나 남들에게는 처음부터 불 보듯 뻔한 답을 혼자 아아 탄식으로 맞이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들이켜고 정신 차려 이 친구야. 뒤늦게 깨닫고 나면 다리를 하늘 위로 쭉쭉 늘려 인정사정없는 하이킥을 날려댄다.




서른이 되고 모든 게 조급해진 나는 소개팅 한 번으로 다시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20살 새내기 시절에나 귀엽게 봐줄 만한 착각을 30살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지지리 궁상맞게 이어가다니. 한 친구는 여전히 사랑을 기대하는 내게 순수하다 말하지만 내가 보는 나는 마냥 찌질하고 한심하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는데 결국 무용지물이다.


십 년 전 친구의 모르겠어? 한 마디가 하루 종일 귓가에 떠나지를 않더니 딱지로 굳어버린다. 다음부터는 절대 모르지 말아야지. 감정을 선두에 세워 내 바람에 더 큰 바람을 불어넣지는 말아야지. 풍선이 빵 터져버리니 놀란 가슴을 달래주고 흩어진 조각을 치우느라 여간 수고로운 게 아니니까 이제는 정신 꼭 붙들어 매자. 눈 동그랗게 뜨고 우리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환상의 나라인지 그 둘은 잠시 잠깐 만나 스쳐갈 현실의 세계인지 꼭 구분해내자.


잘 들어갔느냐, 오늘 덕분에 즐거웠다, 늦었으니 푹 쉬라는 말 이후로 카톡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나는 최선의 매너로 당신에게 할 만큼 했다는 뿌듯함과 더는 눈치 없이 굴지 말라는 경계선을 슬며시 그어놓고 그는 사라졌다.


그가 더는 연락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알겠는 내 마음이 가엽기도 하고 현실을 알면서도 모르고 싶은 아쉬움에 괴롭기도 한 건 아무래도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으니 그렇겠지.


몇 살을 더 먹어야 성급한 감정이 빚어낸 가상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현실 감각을 유지해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지 본인의 매너만 챙기는지 현명하게 분별할 수 있을까.


자신을 어떻게 세워야 오고 가는 타인에게 순간의 설렘으로 마음을 활짝 열어 굳이 상처 받는 일을 막아내고 불필요한 거절감을 거둬낼 수 있을까.


때가 되면 인연을 만나고 자연스레 결혼하게 될 거라는 인생 선배들의 말은 과연 나한테도 해당되는 말인 걸까.


모르겠냐고? 그래, 이건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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