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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Jan 17. 2021

우리 엄마가 늙고 있어요.

아기 할머니 같은 당신

투정 부릴 거 있으면 지금 실컷 해요. 나중에 엄마 늙으면 그것도 못하는 때가 올 테니까.


투정은 자식의 특권처럼 자연스러웠기에 어머 그래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말은 엄마한테 하지 못하겠더라. 무슨 일이든 흥칫뿡 해버리고 엄마에게 조잘대는 재미로 사는 새끼 제비 같은 사람인데도.


세월의 성실함 때문일까. 그 말을 머리로 이해하기까지 단 몇 주의 시간 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거울에 비치는 서른의 내 모습은 29살 때와 여전히 같은 또렷한 얼굴인데, 57세가 된 올해 엄마의 거울에서는 사뭇 다른 풍경이 비친다.


아는 언니네 엄마에게만 보이던 흰머리가 엄마의 이마 라인을 타고 듬성듬성 은색의 꽃을 피웠다. 그 집 엄마는 갑자기 백발이 되었다고 두런두런 함께 얘기하던 게 무색하리만큼 우리 집 엄마가 그 집 엄마가 되었다.


흰머리가 나서도 우리 엄마는 당분간 늙지 않았다. 몇 가닥으로 그쳤을 뿐 인상 좋고 마음 넉넉한 중년의 아주미 역할은 변함없었다. 염색이라는 소일거리가 없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사실 울 엄마는 절대 안 늙어! 하는 똥고집을 지킬 수 있어 안심인 것이었다.


노화를 거치며 노인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세월의 공격은 머리카락에만 오는 줄 알았다. 흰머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무리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해도 얇아질 줄 모르던 엄마의 황소 같은 두 허벅지가 어느 날 돌아가신 할머니의 허벅지로 오버랩되는 게 아닌가. 근육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아 앙상하게 가죽만 남은 할머니 허벅지. 엄마, 다리 살이 많이 빠졌네? 이번에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강원도 홍천으로 드라이브를 떠났다. 시리고 거센 바람에 뒤로 두 걸음 밀렸지만 바람이 떠난 자리에는 아무런 추위가 남지 않으니 겨울 한파 별 거 아니네 했다. 엄마 팔짱을 끼고 아빠가 까주는 군밤을 입안에 쏙 넣어 우물우물 씹으며 산길을 걸었다. 속이 뻥 뚫려 이제야 주말답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빤히 보던 아빠가 먼저 철썩 엄마를 깨운다.


아니 생전 안 자더니 오늘은 대놓고 자네.
속았어, 이럴 거면 집에서 자지!


속았다는 아빠의 말을 부정할 수 없어 다 같이 웃어제꼈지만 그 와중에 생전이라는 단어가 야속하게 들렸다. 뒷좌석에서 두 자식은 곤히 잠들어도 운전하는 아빠의 짝꿍인 엄마는 짝을 배신하고 잠드는 일이 없었다. 물론 이번에는 새벽 늦게까지 드라마를 보느라 잠을 충분히 못 잤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미 엄마의 흰머리와 허벅지에 적잖은 충격인 차에 전에 없던 잠든 엄마의 모습은 쓰리콤보를 완성하는 꼴이었다.


우리 엄마가 늙고 있다.


상깃상깃 난 흰머리에 가늘어진 하반신. 피곤하다는 말도 없이 초저녁에 엎어져 다음날 아침에서야 잘 잤다 말하며 기상하는 우리 엄마는 아기 할머니로 어느새 변신을 마친 것 같다.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은 나보다 엄마가 먼저 체감했을 거다. 엄마는 어느 날 이른 아침 고개를 푹 수그리고 한숨 폭 쉬어가며 입술을 들썩여 중얼거렸다.


다 부질없어.


여기저기 아파오는 몸에 무력감에 빠진 엄마가 내뱉은 말이었다. 늙어가는 엄마를 보며 애잔한 건 나뿐이 아니었던 거다. 굳이 화젯거리로 삼아 시시콜콜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엄마의 노화를 최대한 자연스레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앞으로 우리 엄마는 더 늙을 거다. 할머니의 행동이 우리 엄마의 모습에서 점점 자주 나타나겠지. 그때마다 당황스럽고 울적해지겠지만 최대한 의연하게 마주하면 좋겠다.


글을 쓰다 보니 알게 됐다.

생각해보니 엄마 향한 원망의 투정을 멈춘 지 한참 되었네. 그 때가 이미 온 줄 나는 여태 몰랐다.


그분의 말대로,

엄마가 늙어버릴 그 때가 우리에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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