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스 갬빗, 게임이 아닌 인생을 논하다.
학창시절 때는 보드게임부였고, 좀 더 커서는 <더 지니어스>, <코드>와 같은 게임 관련 방송들을 매주 챙겨보았다.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역시 바둑을 소재로 한 <히카루의 바둑>이다. 최근 들어서는 카드류에도 좀 빠져 있다.
이처럼 반 평생을 두뇌 게임에 진심인 사람으로서, 넷플릭스 홈페이지에 떠올라 있는 <퀸스 갬빗> 썸네일을 눌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재가 체스라니. 그리고 주인공, 베스 하먼이 천재 캐릭터라니.
처음 드라마가 공개된 순간 '대박' 소리가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1화부터 7화까지 전 회차를 한꺼번에 보게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실 천재가 등장하는 스포츠물은 매년 여러 매체에서 등장하는 만큼 전형적이면서도 진부하다. 비슷한 포인트에서 주인공의 비상함을 표출하고 있으며, 최고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그려냄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솔직히 말해 드라마를 보기도 전부터 전개가 대강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이 됐다. 천재, 라이벌, 세기의 대결, 역경과 좌절... 그럼에도 결국 이겨내고 성장하여 '우승'. 뭐, 이런 식으로 흘러가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클리셰물이 왜 영원불변하겠는가. 그 카타르시스가 매번 질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금 전율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설령 <퀸스갬빗>이 진부한 요소로 가득차 있고, 타 스포츠물과 똑같은 행보를 걷는다 할 지라도 불만을 가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재밌겠다'하는 기대 반, '스토리가 뻔하지'하는 예측 반으로 시청하게 된 드라마였다. (솔직히 나 말고도 다들 이런 생각을 하면서, 1화 플레이를 누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7화 마지막화까지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바로 이거였다.
오, 좀 색다르다.
대체 어디서 어떤 이유로 드라마 <퀸스갬빗>을 색다르게 여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특히 나는 이 2가지가 인상깊었다. 주인공의 나약함과 그걸 보완해주는 주변 인물들의 도움. 그리고 드라마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
주인공, 베스 하먼의 인생에는 무수한 역경이 존재하고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 양어머니의 죽음,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약물 중독.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최고의 체스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6화 소제목이 ‘포기’라고 지어질 만큼, 극 후반에 다다러서도 베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전혀 극복해내지 못한다.
그런 그녀를 좌절의 늪에서 건져내는 건 다름 아닌 주위 사람들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베스를 지켜봐온 샤이벌, 위기에 빠진 베스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졸린, 그리고 머리를 맞대고 밤새 수를 같이 생각해준 체스 동료 선수들. 그들이 없었다면 베스는 역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와 전혀 상관없는 웹툰의 한 장면이지만, 나는 <퀸스갬빗>을 보면서 위의 대사가 자꾸만 떠올랐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꿈을 이루고 삶을 살아가기엔 결코 쉽지 않다는 논조를, <퀸스갬빗>에서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체스의 게임 방식이 떠오르게 된다. 이를테면 주인공, 베스는 ‘퀸’이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몇 칸이든 나아갈 수 있는 퀸의 뛰어난 능력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베스와 꼭 닮아 있다. 체스를 처음 가르쳐준 샤이블은 아마도 체스의 기본이 되어주는 ‘폰’이지 않을까. 통통 튀는 성격의 베니 와츠는 변칙적 플레이를 가능케하는 ‘나이트’일 것이며, 베스의 목표점이 되어주는 라이벌 보르고프는 전진만을 거듭해 길을 터주는 ‘룩’이리라.
<퀸스갬빗>은 천재형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이지만, 결말부에서는 그녀의 천재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대결이자 어려운 시합에서 베스를 우승케 만다는 건 베스 개인의 힘이 아니었다. 모두의 도움 덕분이었다. 이러한 인물들간의 상생 서사가 천재형 스포츠물에서는 흔치 않은 전개라 느껴졌다.
마지막 회차 7화에서는 졸린이 베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난 네 수호천사도 아니고, 널 구해주러 온 것도 아니야. 너한테 내가 필요하니가 여기에 온 거야. 언젠가 나도 네가 필요하겠지. 너도 나한테 와줄거잖아.
이 말을 들은 베스는 그간의 고뇌를 잊고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띄우며 웃는다. 그녀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퀸일지라도 혼자서는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폰, 나이트, 룩이 함께여야만 승리할 수 있다.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지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영역으로 치부해버리고 모든 탓을 온전히 자신에게 부과하는 경향이 크다. 나약해서, 의지가 부족해서, 생각이 짧아서... 등등.
자책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드라마 <퀸스갬빗>은 ‘그대, 자책말라.’는 메시지를 6편의 서사로 색다르게 던지고 있다. 단순히 흥미로운 게임에 대해서만 일컫고 있지 않다. 인생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내용까지 담겨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