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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neur May 25. 2023

자유와 기회의 땅 미국으로 떠났다.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나는 주변 친한 지인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난 마음만은 미국인이다. 어메리카 넘버원"


 그러면 다들 웃으면서 '무슨 개소리냐', '그래그래 미국 최고해라', '까고있네' 등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고는 한다. 많이 친한 사람들은 내가 저 말을 하면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미국 찬양' 이러면서 웃어 넘기지만 자주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가끔 당황하고는 한다.


 나는 미국을 좋아한다. 이유는 음 뭐라 설명해야할지 제대로 생각해본적이 없어서 지금에서 생각해 본 결과 두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첫째. 비록 8개월이지만 미국에 거주했던 내 경험은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신기함, 새로움 그리고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많은 부분에서 다양하고도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단 것이 좋았다.


둘째. 나는 최고를 좋아한다. 스포츠도 최고의 팀(물론 좋아하는 축구 팀은 솔직히 최고라고 부르긴 어렵기도 하지만 잘하긴 하니까), 공부도 최고로 잘하는거 등등 프로페셔널하고 자기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과 그 실력을 좋아한다 나라도 마찬가지. 미국이란 나라는 가장 단시간에 크게 성장했으며 그 위상은 가히 세계에서 최고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고 본다. 군사력, 경제력, 문화 파급력 등 전세계에서 보았을 때 가장 파워풀한 국가가 미국이라고 생각하기에 좋아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전세계에서 모국어를 제외하고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언어가 영어라는 점. 비록 영국이 원산지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영국이 아닌 미국이 강해짐으로써 전파한 것이니 미국의 영향이라 보는게 옳을 것이다.


 그래서 적어보려한다. 나의 8개월 미국의 거주기를. 

 그 때 느꼈던 고등학생의 내 자신의 경험과 기분을 그리고 지금 생각했을 때 어떠했는지를 함께 공유하려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2006년 겨울, 대한민국의 한 중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2006년 몇 월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2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을거다. 아버지가 진급을 하게 되셨고 미국 메릴랜드주의 메릴랜드 대학에 연수차 약 6개월 정도를 미국에 가시게 되었다. 그 당시 내 나이 16세, 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의 나는 키도 크지 않고 소심한 소위 요즘 말하는 '찐따'였다. 공부만 했으며 가끔 친구들과 공을 차며 축구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게임을 더 좋아하던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학교에서는 작은 덩치와 자신감 부족으로 맞고 다니는 축에 속했고 그나마 공부도 조금은 하더니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등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국영수만 잘했다 정도.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려던 찰나 미국으로 유학이 확정되며 나는 중학교 졸업식을 놓치게 되었고 친구들과 생이별(?)을 하며 그렇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출발하였다.


 대략 15시간 정도 걸린 비행기는 참으로 길고 좁았지만 도착한 미국 땅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유년기 시절에도 물론 독일을 비롯해 유럽 몇개 국가에서 지낸 경험이 있지만 기억도 안날뿐더러 사실상 내게는 첫 해외였던 셈.


 공항에 도착하자 무관 아저씨를 비롯해 몇 몇 아저씨가 아버지를 마중나왔다. 아무래도 나라를 대표하여 교육을 받으러 온 셈이니 무관 아저씨를 비롯해 뭐 신경을 좀 쓰긴 해야했을 것이다. 처음 도착한 미국의 공항은 신기했고 한국에서 보던 외국인들과는 달리 확실히 현지인이라는 느낌의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그렇게 나는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처음 타본 외제차였고 신기함도 잠시 나는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어머니가 깨워서 눈을 떠보니 어떤 아저씨네 집에 도착했고 우리는 잠시간 휴식 후 새로운 부부를 만났다.


 '피오'란 이름의 아들을 가진 부부였다. 한인 부부로 아마 이민 1세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자식인 피오는 당연히 이민 2세. 우리는 그 집으로 다시 향했고 나는 여전히 시차로 인해 다시금 심연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피오네 집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그 집에 들어갔다. 아직 피오와 그 여동생은 하교를 하지 않았으므로 집에 없었고 나는 홀로 피오네 어머니의 안내로 티비를 보게 되었다.


 온통 영어였다. 나는 그 당시에 중학생 치고는 영어를 잘하는 축이었는데(나름의 근거도 있다. 당시 윤선생 영어 교실이라는걸 했는데 뭐 어쨌든 최고 레벨 수준으로 평가 되었었다) 진짜 한개도 못알아 듣겠더라. 사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생각해둔 것이 적어도 이 기간 동안 영어 하나만큼은 제대로 배워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8개월간 나는 정말 이민자처럼 영어를 터득했고 내 기준이지만 정말 단시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레벨까지는 올려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요즘은 잘안써서 많이 굳었지만...


 티비를 보다보니 시간이 흘러 피오와 그 여동생이 하교하여 우리는 서로 인사, 내가 한 살이 더 많았기에 형이라고는 불러주었지만 실상 미국식 마인드인지라 뭐가 다른지는 잘모르겠더라 그냥 호칭이 형인 느낌? 그래도 한가지 좋은게 있었다. 아무래도 미국에 거주하는 아이다 보니(생각해보니 그쪽도 이제는 30대구나 하하) 플레이스테이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쪽 부모님도 내가 있으니 오늘은 자유롭게 게임을 하도록 허락해 주셨고 우리는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워낙 게임을 좋아하는 나인데다가 플스는 살면서 가져본 적이 없고 친구네 집 혹은 플스방 몇 번 가서 해본게 전부인 나로서는 정말 즐거운 경험으로 비록 영어였지만 게임에 영어 한글이 중요하리? 그저 재밌게 즐겼을 뿐이었다. 그 외에도 그 친구가 가져다줘서 먹은 미국 육포가 있었는데 처음에 엄청 자극적이었다. 짜고 달고... 근데 나중에 미국에서 내내 그 육포만 찾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꽤 맛있었던듯!


 또 시간이 흘러 저녁 시간이 되어 피오네 가족과 함께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Old Country Buffet'라는 곳으로 전형적인 미국식 뷔페였다. 아직 고1도 아닌 중3의 나이인 나는 당연히 한창 먹을 나이였고 뷔페는 언제나 선호되는 컨셉의 식당이었기에 신이 났었다. 들어간 곳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나 음식은 꽤 괜찮았고 인당 2만원이 되지 않는 가격치고는 스테이크에 여러가지 고기 종류가 많이 나오는게 정말 좋았다. 그중 단언코 하이라이트는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초코우유를 따로 마실 수 있었는데 아마 이 때부터 내가 살이 찌기 시작했을 것이다. 초코우유는 맛있으니까...

Fairfax county에 있던 것. 찾아보니 없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끝으로 하루가 끝이 났다. 나는 당연하게도 배가 부르니 시차로 인해 다시금 잠이 몰려왔고 그렇게 내 미국에서의 첫날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게 끝이 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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