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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neur Jun 29. 2023

VYS의 한국인 에이스 vol.1

Vienna Youth Soccer

 모교인 JMHS의 대표팀은 탈락했지만 그래도 사비를 내어 뛸 수 있는 지역팀이 있었다. 당시 내가 거주하던 곳은 Vienna였는데 내 기억상으로도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 찾는 게 바로 축구팀을 찾는 거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공을 차기 시작해서 중3 그리고 이제 고1이 된 나이였는데 사실 그 사이에 어느 팀에 소속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번 친구들을 모아서 차거나 아니면 몇몇이 모여 운동장에 가면 공을 차고 있는 사람들끼리 팀을 모아 같이 차는 게 전부였었다.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웃기게도 영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녀석이 미국에선 바로 들어갈 축구팀을 먼저 찾아본다니 무언가 대단하면서 진취적인(?) 모습이 낯선 느낌이다. 


 지금이야 뭐든 하려는 걸 잘 찾기도 하고 능동적이지만 그 당시에는 수동적이고 무엇하나 혼자 해내기 어려워했던 녀석이었는데 홀로 검색하고 연락하고 찾아내는 걸 보니 축구를 좋아하긴 했나 보다 싶다(지금도 좋아한다)


 어쨌든 겨우겨우 찾아낸 게 바로 Vienna Youth Soccer(통칭 VYS)였다. 비엔나 지역의 유소년 축구팀? 그런 것인데 굳이 이야기하자면 프로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 혹은 뭐 그런 느낌의 축구팀이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동호회 느낌에 가까운 팀이었다. 이것도 학교와 비슷한 시기에 시즌을 시작하여 약 2달간 진행되는데 당시 팀은 VYS1과 VYS2 이렇게 두 팀으로 나뉘었고 나는 그중 VYS1팀에 소속되었다.


 우선 설명을 하자면 하고 싶은 애들이 지원을 한다. 그리고 이제 인원을 분배하고 팀을 만든다. 팀 구성 및 신청은 선착순이라 인원이 넘어갈 경우 신청이 불가능하다.


 유니폼의 경우 처음 구매 시 당연히 돈을 주고 사야 하는데 이때 등번호가 선착순이었다. 물론 이미 지난 시즌을 뛰고 올해도 또 뛰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들은 그냥 입던 유니폼을 그대로 입어도 됐다.

 당시 나는 박지성을 좋아해서 7번과 13번을 탐냈으나 이미 빼앗긴 상황이었고 17번이 남아 그 번호를 택했다. 나머지는 전부 뒷번호라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지금 와서야 불행 중 다행히 사실 13번은 큰 의미가 없고 7번이야 좋은 번호이니 그렇다 치고 17번이 과거 제라드 등번호라 만족하고 있다.


 그렇게 시즌이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이 팀은 따로 코치가 정해져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던 거 같고 팀 멤버 중 한 명의 아버지가 코치를 자진해서 하셨다. 그렇게 코치도 있고 매주 평일이었나? 에 훈련을 1회 그리고 주말엔 경기를 가져가는 시스템이었다. 당연히 승점 제도가 있었고 내 기억이 맞다면 점수가 높으면 추가로 후반기에 토너먼트 형식의 게임에 참여하는 듯했다(이 말인즉 내 팀은 못 갔다는 이야기...)


 이렇게 시작된 시즌, 내게는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제대로 된 축구팀인 VYS1 팀은 아마 그 시절 미국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로 기억되는 좋은 추억이다.

당시의 나다. 저 축구화도 미국에서 산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모으고 있는 수집품 목록에는 없더라

 처음 훈련장을 방문한 날이었다. 당연히 역시나 적시나 나는 동양인이라는 생각에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만나본 팀 멤버는 대체적으로 착한 녀석들이었다. 다들 Vienna 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 같은 학교 학생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첫 만남인 데다가 축구라는 미국에서는 마이너한 스포츠 그리고 나는 이제 막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새로운 전학생이기 때문에 아는 얼굴은 없었다. 


 따로 서로의 개인 신상에 대해서는 크게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없어서 이름 정도만 알고 지내던 사이로 남기는 했다... 그래서 서로의 국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오직 한 친구 이제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VYS팀에서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로 백인에 키가 좀 작은 친구였다. 녀석은 순수한 어메리칸으로 첫날부터 나와 공을 차며 친해졌고 마지막 경기가 끝나는 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가장 아쉬워하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의 이름을 까먹다니 나란 녀석도 참...


 그 외에는 나와 같은 아시아계열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이 친구는 놀랍게도 입양아였다. 아버지가 데리러 오신다 하여 나도 옆에 있어서 만나 인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순수한 백인 남자였던 것이었다. 참 어렸다고 느껴지는 게 그 순간 내가 그 둘을 번갈아 보며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자 그 친구가 내게 자신은 입양아라고 설명하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고 오히려 그 부자는 더 우애가 깊어 보였다. 당시도 실수한 바를 인정하고 후회했지만 지금 드는 생각은 참 철이 없긴 없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렇게 시즌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토요일 리그전, 일요일은 VYS2팀과의 친선전 이렇게 두 게임을 매주 한 번씩 진행하게 되었다. 


 약 2~3달에 가까웠던 축구 리그. 여전히 축구를 좋아하고 지금도 팀을 구해서 뛰고 있는 내게 있어서 30년 넘는 인생 가장 즐거웠다고 생각하는 정말 값진 경험의 순간들. 그 순간들을 이 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추억하게 되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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