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때때로 그림을 그린다.

- Yarra River에서

by 시오




호주, 멜버른

Australia, Melbourne

December 2015



새벽에는 비가 내렸다. 한 낮에는 덥다가도 느닷없이 비가 내린다. 새벽 공기가 생각보다 많이 차가웠고, 차가운 공기에 놀랐는지 토비가 아침에 내 침대로 올라와 같이 잠이 들었다. 차가운 공기 탓에 잠을 더 청할까 싶었지만, 나는 이내 몸을 일으켜 외출 준비와 아침식사 준비를 했다. 노란 계란물에 식빵을 적셔서 프라이팬에 굽고, 하얀 요플레도 그릇에 담았다. 그 사이 커피 포트에 물을 담아 물을 끓였고, 흙색의 커피 가루는 컵 속에서 물을 감싸 안고 퍼져나갔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빨간 카디건이 차가운 바람을 조금 막아주는 듯했으나, 목덜미에 차가운 공기가 스칠 때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기차역은 오늘 따라 적막감이 맴돌았다. 퀸 빅토리아 마켓 (Queen Victoria Market)을 들렀다가, 야라 강 (Yarra River)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들은 잔디 위에 누워있거나, 자전거를 타고 강 주변을 달리기도 하고, 크루즈를 타고 강을 가로질러 저 끝으로 사라져갔다. 야라 강은 평온함 속에서 분주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야라 강을 따라 걸었다. 나는 선글라스 너머로 사람들을 쳐다봤고, 사람들도 나를 쳐다봤다.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잔디 위에 누웠고, 나는 햇빛이 잘 드는 벤치에 앉았다.



물병에 담아온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에, 공책과 펜을 꺼내 무릎에 올려놓았다. 무언가 적어보려 했지만, 이내 멈췄다. 어떤 것도 쓸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아무리 무언 가를 쓰려고 해도 말이다. 공책을 잠시 접어 두었다가, 다시 펼쳤다. 평온하지만 분주한 야라 강을 기억할 만한 '무언가'를 공책에 남기고 싶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했다. 나는 때때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그림을 그린 적은 없다.


IMG_20151227_214402.jpg


연두빛깔의 나무들을 그렸다. 네 그루 정도. 그리고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건물도 그려 넣었다. 나무들을 그리고 있는 사이에 보트가 한 대 지나간다. 보트와 함께 보트가 지나가면서 만들어 낸 물살도 같이 그려 넣는다. 마지막으로 몽실한 구름도 두어 개 그려 넣는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야라 강을 기념하기 위한 그림으로는 보이지 않아, 바로 다음 장에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IMG_20151227_214257.jpg


선글라스를 먼저 그려 넣는다. 코와 입 그리고 턱선을 그려 넣는다. 야라 강의 나무들을 남자의 머리에 심어 본다. 그리고 머리 밑에 작은 물살을 그리며 지나가는 보트를 그려 넣는다. 어깨 위에는 야라 강 뒤편으로 보이는 건물들을 그려 넣는다. 야라 강을 기억하기 위하여, 남자의 가슴에 YARRA라는 문구를 적어 놓았다.



그림을 그리는 사이, 나의 그림을 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잘 그리는 그림도 아닌데 부끄러워 공책을 덮으려 하다가, 이내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갔다. 그림을 다 그린 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고, 강가를 따라 들어선 레스토랑과 바가 지나가던 사람들을 붙잡았다. 나는 강을 따라 마저 걸은 후에, 다시 역으로 향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