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만나보고 싶은 오후

- 400 Gradi, Licensed Fromagerie

by 시오




호주, 멜버른

Australia, Melbourne

January 2016


호주에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제 정말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새벽에 비가 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가려고 했는데, 비가 오면서 일정은 자연스럽게 취소되었다. 누구와 한 약속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을 변경해야 한다고 연락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이틀 전에 옆 방으로 이사 온 오원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외출 준비를 했다. 테니스 경기를 보기 위해 나가는 준비를 서두르는 것 같았다. 그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나는 그의 뒤를 이어 욕실에 들어갔다. 오원은 큰 몸을 움직이며 현관으로 향했는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집도 같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하얀 블라우스와 파란색 치마를 입고 머플러를 둘렀다. 현관을 나섰을 때, 옆집에 사는 앤드류의 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짧게 인사를 하고 우산을 펼치려는데, 앤드류는 트레인 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이런 호의는 언제든지 좋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가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 어제는 직장에도 가지 못했다고 했다. 서툰 위로를 하고 싶지 않아, 나는 괜스레 비가 와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빗줄기가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비가 내렸다. 오늘은 유난히 트레인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냐며 옆 자리에 앉은 할머니에게 묻고 싶었으나, 할머니도 많은 사람들로 인해 조금은 당황한 듯한 표정이어서 묻지 않았다.


400 Gradi


트램으로 갈아타고 내가 향한 곳은 라이곤 스트리트에 (Lygon Street) 위치한 400 Gradi 였다. 14년도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피자 월드 챔피언쉽에서 1등을 한 레스토랑이라며, 멜버른에서 꼭 들려야 하는 레스토랑이라고 가이드가 추천해준 적이 있었다. 레스토랑은 어렵지 않게 찾았지만, 생각보다 멀리 위치해있었다. 피자와 샐러드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이병률 작가의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책을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글이 마음에 노를 젓고 들어와 고요했던 물결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일렁이는 물결과 마주하고 있을 때, 빨간 토마토소스가 유난히도 붉은 마르게리따 피자가 나왔다. 달콤하기도 하고 새콤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하나 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피자가 너무 맛있으니 같이 먹자며 길가에 있는 사람들 까지도 불러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잘 모르는 동네에 왔으니, 몇 걸음 더 걸어보자고 내게 말했다. 비는 어느새 그쳤고, 비가 그친 뒤에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내 옆으로 한국인처럼 보이는 여자가 지나갔다. 아무런 표정이 없어 말을 붙이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흥미로워 보이는 가게와 서점을 몇 군데 들어갔다 나오자, 몇 분 전에 무표정하게 지나갔던 여자가 반대편 횡단보도에 서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작은 소포를 들고 있었고, 그 소포는 한국에서 온 것이었다. 여자는 아까와 다르게 소포를 귀하게 바라보며 웃고 있었고, 그 표정이 비가 그친 뒤의 맑은 하늘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Milk the Cow


곳곳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마땅한 카페를 찾기가 조금 어려웠다. 야외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보여 나는 무심코 가게로 들어갔다. (Milk the Cow) 이름도 모르는 술과 다양한 모양의 치즈가 진열되어있는 곳 뒤에서 종업원은 분주하게 와인을 따르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가족들을 따라 와인과 치즈를 시켰고, 마무리 짓지 못한 책을 마저 읽었다. 잔잔한 음악 사이로 옆 테이블에 앉은 가족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여자 아이 둘은 치즈와 음료에 대해서 엄마와 아빠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 것인지, 어느 새 와인이 내 목을 타고 들어가 심장에 맞닿아서인지 나는 문득 내 앞에 딸이 앉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나는 문득 내가 언젠가 만나게 될 딸을 지금 당장 만나보고 싶었다. 내 앞에 딸이 앉아있고 나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그 아이가 물어보는 것들에 조곤조곤 대답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어떤 성별의 아이가 나를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와인, 치즈 그리고 딸은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조합 인지도 모른다. 내가 언젠가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이 경험을 잊지 않고 나의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기다려왔어. 물론, 와인을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던 건 아니야. 단지, 그 순간 만큼은 네가 물어보는 모든 질문에 가장 성실하게 대답해줄 수 있을 거 같았어. 그리고 네 미소를 보고도 싶었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너의 미소가 엄마는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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